삼성직무적성검사(SSAT·사트) 시험이 있던 10월13일. 서울 강동구 성내중학교의 한 교실에 입실 마감 시간인 아침 8시30분 턱걸이로 도착했다. 아찔했다. 조금 전 인근 강동역에서 낯선 남자와 택시를 합승하는 것을 주저했더라면 시험을 못 치를 뻔했다. 숨을 고른 뒤 주변을 둘러봤다. 교실 안은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추리닝 차림의 남학생이 눈에 들어온다. 앳된 얼굴인데 코 밑에 거뭇한 수염이 비친다. 고등학생인가. 얼핏 봐도 서른 살은 훌쩍 넘긴 듯한 이도 여럿이다. ‘국민시험’ 사트가 맞긴 하구나.
대다수 취준생에게 사트는 ‘넘사벽’아침 9시, 드디어 시험이 시작됐다. 언어·수리·추리·상식 등 네 과목의 총 180문제를 130분 만에 풀어야 한다. 내 전략은 ‘무조건 빨리 풀기’다. 전날 모의고사를 볼 때 문제의 절반도 풀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로그값, 원의 넓이 구하는 공식을 떠올릴 틈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정답을 고르고 조금이라도 막히면 느낌대로 찍었다. 그래도 15문제는 손도 대지 못했다. 공허하고 먹먹하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을까. 시험이 끝나고 휴대전화를 돌려받자마자 사트 대비 스터디를 했던 팀원들이 카카오톡을 보내왔다. “와, × 어렵네.” “다들 고생했어!” “오늘 푹 쉬자.” 지난 2주간 매일 아침 9시부터 3시간씩 인터넷 강의를 함께 들으며 고생했던 그들의 넋두리와 응원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결국엔 3명 모두 사이좋게 떨어졌지만.
취업준비생 사이에서 삼성은 ‘연애의 고수’로 불린다. 모든 상대방이 대시할 기회를 주되(모든 취준생이 사트를 볼 수 있게 해주되), 엄격하게 상대를 평가한다(사트는 물론 그 뒤에 줄줄이 기다리는 에세이와 면접도 어렵다). 이런 까다로운 테스트를 통과해 간택된 승자가 연애의 고수에게 올인하는 것처럼, 최종합격자는 삼성에 제 몸 바쳐 일할 각오를 ‘탑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매력이 넘치지만 까다롭고 충성도 요구하는 ‘나쁜 남자’다. 정말일까.
삼성은 열린 공채를 한다. 학벌·성별·나이 등을 따져묻지 않는다. 사트만 열심히 공부하면 스펙이 나빠도 입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누구에게나 준다. 이 가능성 하나를 보고 올해에는 역대 가장 많은 10만 명이 사트에 도전했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취업 카페에 삼성의 합격 수기를 올리는 사람 중에는 지방대생이 유독 많다. “저는 소위 말하는 지잡대(지방 잡스러운 대학)라는 곳에 다니고 있습니다. 드디어 뛰어든 취업 전선! 결과는 서류 전패. ‘내 인생은 수능 이후로 결정된 것인가.’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었습니다. 서류를 안 보는 삼성이 있었거든요. 사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간 하루에 14시간씩 사트 공부만 했습니다. 결과는 합격, 그리고 생애 첫 면접을 보았습니다.”(아이디 ‘독sxx’)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대다수 취준생에게 사트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다. 10만 명의 돌 중에 5500명의 옥을 가려내야 하니, 제한 시간 대비 난이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초·중·고 공교육을 받은 누구나 문제를 풀 수 있는 난이도’라는 사트 인터넷 강사의 설명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누구나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10년이 지나도 수학 공식을 달달 외우고 대학 전공 서적에나 나올 법한 경영학 단어들을 절로 알게 된다는 말일까.
어떤 곳이건 기회 주는 ‘고마운 곳’이런 바늘구멍을 뚫고 삼성에 입사했을 때 애사심이 들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삼성 최종합격자 발표가 있던 11월27일, 인터넷 취업 카페에 올라오는 합격자 수기를 들여다봤다. “합격시켜주신 삼성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열정을 다 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한 남성이 말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아마 삼성 입사 소식을 듣는 순간, 그의 가족과 지인의 태도부터 열광적으로 변했을 테니 말이다.
올해 상반기 삼성에 들어간 내 지인도 입사 뒤 ‘주변의 시선’이 가장 달라졌다고 말한다. “한번은 제일모직 매장인 갤럭시에 옷을 사러 갔어요. 좀 허름하게 입고 갔는데 매장 직원이 거들떠도 안 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삼성에 다닌다고 하니까 ‘어머, 삼성 다니세요?’ 하면서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삼성 임직원은 20% 할인을 해주거든요.” 집안의 걱정이던 그는 단숨에 집안의 자랑이 됐고, 가족·지인으로부터 소개팅과 선이 쉴 새 없이 들어온단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 직원이 고용불안과 열악한 근무환경 때문에 목숨을 끊었건, 삼성이 백혈병 환자에게 산업재해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는 곳이건, 삼성은 모든 취준생에게 기회를 주는 ‘고마운 곳’이다. “학력도 별로고 나이도 많은 널 ‘받아줄’ 곳은 삼성밖에 없어.” 취업컨설턴트가 내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날 받아줄 유일한 곳이 삼성이라면 주저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사고하는 습관을 가지기 이전에 살아가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알베르 카뮈가 말하지 않았는가. 결국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일단은 나쁜 남자에게 대시하는 게 우리의 본능인 것처럼 말이다.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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