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미 - 지난해 2월, 남자친구 주현을 따라 서울 시내 H대학 졸업식의 뒤풀이에 갔다. 양복을 빼입은 주현의 대학 동기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각자 명함을 건넨다. 대기업 입사 한 달차 신입사원인 한 남자가 마치 임원이라도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씨, 신입사원 연수교육을 갔는데 왜 대기업에 가는지 알겠더라. 괜히 대기업, 대기업 하는 게 아니더라니까.” 나보다 1살 어린 다른 남자도 회사 자랑에 열을 올린다. “누나, CJ 들어오세요. 여자가 들어가기 제일 좋은 회사예요. 복지카드만 있으면 카페든, 어디서든 돈 쓸 일이 없다니까요.” 그 자리를 견디기 어려워 혼자 일찍 자리를 떴다.
내가 일어나기 전 나보다 먼저 떠난 남자가 있었다. 유난히 조용하던 그는 중소기업에 입사했다고 한다. 그곳에 신입사원 연수교육 따위는 없었다. 바로 현업에 배치됐다. 복지카드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연봉도 그의 자신감에 영향을 미쳤을 거다. 1년에 1천만~2천만원은 친구들 연봉과 차이가 날 테니 말이다. 물론 ‘얘는 2천만원짜리, 쟤는 4천만원짜리’라는 주변의 냉혹한 시선이 가장 참기 힘들겠지만.
이나연 - “난 아무래도 사무직 운명인 듯해.” 고교 동창 수현이 말했다. 이때 ‘사무직’은 공기업을 뜻한다. 수현은 원래 통역사를 준비했다.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하고 외국인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던 그에게 꼭 맞는 직업이다. 그러나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부모님이 자꾸만 공기업을 가라고 하셔.” 수현은 결국 얼마 전 공기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역술집에서도 공기업의 합격운이 더 세다고 했단다. “여자가 일하기엔 역시 공기업이 최고 아냐?” 수현은 이제 ‘공기업 예찬론자’가 됐다.
취업준비생들에게 공기업의 가장 큰 매력은 ‘가늘지만 긴’ 직장생활이다. 대기업보다 연봉은 적겠지만 웬만해선 정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안정성으로 따지면 공무원이 으뜸이지만 관공서에서 행정 업무를 보는 일은 왠지 고리타분하고 지루할 것만 같다. 게다가 한국은행, 한국수출입은행 등 금융공기업은 연봉도 대기업보다 많고 민간부문에 미치는 힘도 세다고 하니 취준생들이 목맬 수밖에 없다.
금융공기업이 동시에 필기시험을 치르는 ‘A매치 데이’였던 지난 10월19일, 나도 시험을 보려고 건국대로 갔다. 정문에선 진풍경이 벌어졌다. 퀵서비스 오토바이 기사들이 응시생들을 줄지어 내려준 뒤 “시험 잘 보세요!”를 외치며 떠나갔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한 응시자는 “오전에 여의도에서 수출입은행 시험을 보고 오후 1시까지 건국대로 곧장 오느라 점심도 못 먹었다”고 했다. 하루에 몰린 금융공기업 필기시험 덕에 퀵서비스 기사들에겐 모처럼 운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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