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선택제 일자리. 노동 전문가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낯선 용어다. 기존에 쓰던 공식 용어는 ‘시간제 일자리’였다. 그런데 지난 9월부터 ‘시간선택제 일자리’라는 신조어가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자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시간제 일자리라는 어감이 좋게 와닿지 않는다. ‘시간선택제 일자리’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괜찮은 것 같은가?” 지난 8월16일 인천광역시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시간제 일자리란 용어의 주체가 고용주라면,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근로자가 주체가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박근혜 정부는 고용률 70% 로드맵 달성을 위해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강조해왔던 터다. 대통령의 한마디로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로 새롭게 포장됐다.
법에도 없는 용어 ‘시간제 일자리’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시간제 일자리는 법에도 없는 용어다. “단시간 근로자란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이 그 사업장에서 같은 종류의 업무에 종사하는 통상 근로자의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에 비하여 짧은 근로자를 말한다”(근로기준법 제2조 8항)고 정해뒀을 뿐이다. 근로기준법에 ‘선택적 근로시간제’라는 조항(제52조)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근로자한테 ‘시간의 통제권’을 주겠다는 뜻은 아니다.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하되, 주 40시간 이상의 초과근로가 가능하려면 ‘근로자의 결정’이 필요하다는 근거를 만들어둔 것에 불과했다. ‘선택’은 제한적이다.
‘시간제 일자리’와 ‘시간선택제 일자리’라는 두 가지 용어를 뒤섞어 쓰던 정부는 최근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분위기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시간제 일자리 확대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핵심적인 여성 고용 정책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컨설팅을 받고서 주 15~30시간 일하는 신규 근로자를 채용한 기업에 대해 근로자 1인당 월 40만원을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1년간 임금의 절반을 지원해주는 제도를 시행했다. 2010년부터 정부기관에선 ‘시간제 공무원’을 시범적으로 뽑기 시작했다. 요즘 박근혜 정부가 ‘시간선택제 일자리’의 핵심 정책으로 발표하고 있는 내용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업 지원금 한도를 월 60만원으로 올리고, ‘선택’이라는 단어만 새로 끼워넣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7년까지 근로시간 단축, 여성 일자리 확대, 공공기관에서의 파트타임 근무 확대 등을 통해 시간제 일자리 93만 개를 새로 만들어내겠다고 밝혔다. 신규 일자리 창출 목표(238만 개)의 40%를 시간제 일자리로 채우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임기 안에 공공부문에서 1만6500명을 시간제 공무원·교사 등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기획재정부는 산하 공공기관에 인력 증원시 시간제 채용 비율을 할당해 내려보내기까지 했다. 내년부터 2017년까지 ‘5%→7%→10%→13%’로 점차 비율을 높여가야 한다는 식이다.
민간 기업들은 정부 입맛에 맞추기 위한 채용 계획을 잇따라 내놓았다. CJ그룹이 경력 단절 여성을 뽑는 ‘리턴십 프로그램’을 시행해 평균 17 대 1의 높은 경쟁률로 ‘재미’를 톡톡히 본 뒤, 스타벅스(신세계)·기업은행·SKT 등이 차례로 경력 단절 여성을 대거 채용했다. 지난 11월26일에는 삼성·롯데 등 10개 그룹이 정부 주최로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시간선택제 일자리 박람회’에 대거 참여해 1만여 명의 채용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용·임시직에 임금은 정규직의 47%
정부가 장밋빛 환상을 덧씌우고 있지만, 시간제 일자리의 현실은 열악하다. 현재 전체 임금노동자의 10%가량인 176만여 명이 시간제로 일하고 있다. 이 가운데 1년 이상 일하는 상용직은 9%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일용직(31%)이거나 임시직(60%)이다. 평균 근속기간은 17.2개월로, 비정규직 전체 평균(27.7개월)보다 낮다. 업종으로 보면 대형마트 등에서 일하는 서비스·판매, 단순노무직이 대부분(70%)이다. 특히 여성의 비중이 70%가 넘는다. 가장 큰 문제는 임금이다. 시간제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정규직 대비 46.6%(2012년) 수준이다. 2002년(78.6%) 이후 임금 격차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법정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시간제 노동자의 비중도 2002년 15.8%에서 2012년 28.5%로 되레 높아졌다. 2012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시간제 노동자의 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 가입률은 12~14%대에 그쳤다.
이런 이유로 노동계는 박근혜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확대에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저임금이 강요되는 시간제 일자리의 열악함을 정부가 거짓 홍보로 은폐하려 하고 있다. 일자리가 없어 고통받는 여성 노동자와 청년층에게 ‘실업이냐, 시간제냐’를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11월26일 코엑스 박람회를 반대하는 민주노총의 기자회견)
그렇다고 시간제 일자리가 꼭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한국은 최장 근로시간에 허덕이는 나라다. 근로자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이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705시간)보다 400시간 가까이 많다. 육아·출산 등으로 인한 여성들의 경력 단절 현상도 심각하다. 30대 여성의 고용률은 54.5%로 같은 연령대 남성(90.3%)의 60% 수준이다. 근로시간을 줄이고 여성들이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해주면 개개인 삶의 질은 높아진다. 콜센터·유통매장 등 특정 시간에 업무가 몰리는 기업 처지에선, 시간제 일자리가 확대되면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여성 전문인력의 유출을 막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11월28일 고용노동부가 펴낸 라는 책자를 보면, 시간제 일자리는 △육아·학업 등으로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4대 보험 가입·최저임금 등 기본적 근로조건을 보장하고 △임금·근로조건 등에서 불합리한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돼 있다. “현행법적으로는 근로기준법상 단시간 근로자에 포함되지만, 고용의 질 측면에서 나은 일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정부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코엑스 박람회에 참여했던 10대 그룹이 채용하기로 한 시간제 일자리의 70%가량은 계약 기간이 1~2년에 불과했다.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정규직 전환 여부가 결정되는 ‘하루살이’ 일자리다. “시간제 일자리가 연착륙하기 위해선 제도적 보완이 먼저 필요하다. 기존 전일제 노동자가 시간제로 전환할 때 인사·승진에 차별이 없어야 하고, 사회보험 적용률을 10%대에서 8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임금 격차도 없어져야 한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의 지적이다. 고용노동부는 시간선택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법안을 마련 중이다.
‘강요된 선택’은 선택이 아니다
“시간제 근로가 일부 중산층 육아기 여성에게 노동시장 참여를 가능하게 해주는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양육 부담이 없는 여성이나 저소득층 세대주 여성도 시간제 근로로 선택이 제한돼 장기적으로는 여성의 경력 개발 기회 박탈, 은퇴 연령에서의 빈곤을 초래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부는 남성은 생계부양자이며, 여성은 돌봄노동자로 부차적인 소득활동만 해도 된다는 인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대책은 여성을 경력 개발이 어려운 파편화된 시간제 근로에 한정시키는 문제점을 노정한다.”( 10월호의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기고글)
‘파트타임의 천국’이라 불리는 네덜란드에선 시간제 일자리의 비중이 37%에 이른다. 시간제 노동자의 70%는 자발적으로 선택했고, 65%는 정규직이다. 시간제와 전일제를 오가는 선택도 자유롭다. 한국은 네덜란드와 다르다. ‘강요된 선택’은 ‘선택’이 아니다. 시간제 일자리밖에 선택지가 없는 세상이 ‘천국’은 아니지 않은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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