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기억으로 반추하기는 하지만 군대 시절과 더불어 결코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삶의 한 부분이 6말7초(六末七初) 까까머리 중·고교 시절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 돌아간다면 꼭 다시금 잘해보고 싶은 과목이 ‘기술’ 과목이다. 시골로 이사와 살다보니 이니 니 하던 당시의 입시 바이블들은 정말로 쓰잘데기 없는 ‘과도한 배움’들이었다. 이곳 살면서 미적분은 고사하고 중학교 때 배운 피타고라스 정리라도 사용하는 경우는 3 대 4 대 5의 비율을 이용해 직각으로 텃밭을 구획할 때뿐이다. 더구나 이처럼 유용하고 너무도 자명한(?) 지식을 실사구시(實事求是)한 것도 교과서가 아닌 서양 잡지를 통한 재활용 덕분이었다. 미적분 방정식을 고안해낸 천재들의 이치를 곰곰이 따라잡다보면 정말로 경탄할 세계지만, 이곳 살다보면 실제로 피부에 더 와 닿는 지식은 기술 시간에 배웠다고 생각하는 나사못, 볼트·너트의 종류와 엔진오일의 점도에 따른 교체 시기다.
어찌 보자면 좀 느지막한 나이에 중·고교 시절 하찮게 여겼던 기술 과목의 새 선생님을 ‘모실’ 행운을 잡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겨울철에 차 시동이 안 걸리거나 예초기가 고장나면 도움을 청하던 삼거리 버스정거장 옆 타이어 가게 양 사장이 암으로 가게 문을 닫은 뒤였다. 새까맣게 기름때에 절어 닳고 닳은 뭉툭한 손톱으로 땅바닥에 지도를 그리며 읍내 끝자락 역말에 있다는 공구 수리점을 이야기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10년 연하의 일 친구 윤현 사장을 알게 된 것이 얼추 10년은 넘었을 게다.
내가 내 집 왕국의 황제이자 몸종이듯이 그 또한 15평 남짓 컨테이너 하우스 공구 수리점의 사장이자 종업원이다. 벽과 바닥은 물론 천장에 매단 선반까지 온갖 종류의 부품과 공구들로 가득한 그의 왕국에 들어서면 연륜과 관록이 그대로 느껴진다. 내가 어지러운 내 연구실의 구석 어디에 어느 책과 논문이 있는지 알듯이 그 또한 그 어지러워 보이는 부품과 물건의 더미 속에서도 정확하게 몇mm 볼트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내가 내 학생들의 제출 리포트를 죽 훑어만 봐도 논리와 사실관계의 옳고 그름을 읽어내듯이 그는 나사못의 구멍만 보고도 몇mm 너트가 필요한지 그대로 알아맞힌다. 척하면 척인 그의 기계 수리 자문은 어설픈 나의 전화 문의를 정확한 진단으로 바꿔놓는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방문하지 않고도 양수기 모터를 고쳤으며 20년도 넘은 동력 운반차의 자주 꺼지는 시동을 응급처치 할 수 있었다.
그는 노후 걱정이 없단다. 마음 드는 시골에 정착하면 어디서든 그의 기술은 대환영 일색이란다. 내 알량한 평생 공부가 노후에 그의 농촌 기계 수리 봉사에 필적할 것인가에 대해 나는 자못 심각하게 부정적이다. 그래도 위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 꼬부랑 글씨 친숙도에서는 내가 그의 선생이다. 윤 사장은 놀던 젊은 한 시절 팝송에 푹 빠졌더란다. 멋진 음악 카페의 DJ가 꿈이었는데 그놈의 꼬부랑 영어가 약해 곡의 가사 해석이 문제였단다. 몇 년 전부터 그는 놀랍게도 꿈을 이루기 위해 일과 후에 읍내 영어학원에 다니기까지 했다. 아쉽게도 얼마 아니 되어 수강생이 그 혼자라 학원이 문을 닫았지만 이런 난관도 윤 사장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넉넉지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까지 몇 개월 혼자서 인테리어를 하더니만 공설운동장 옆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목로주점 ‘바보 카페’를 열었다. 그가 평생 모아 공구 수리점 한 벽면을 가득 채웠던 낡은 레코드판들도 이사를 했다. 평소 술집 방문과는 거리가 먼 내가 아내와 함께 개업식에 참석하니 윤 사장은 나의 신청곡으로 피터 폴 앤드 메리를 틀어주었다. 얼마 전에는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플리트우드 맥의 LP판을 구했다며 좋아했다. 지나가는 나의 말을 잊지 않고 판을 구해준 나의 또 다른 기술 선생님에게 감사하며 동시에 나의 고교 시절 진짜 기술 선생님 정소웅 선생님께 송구한 마음 전합니다. 선생님 ‘바보 카페’로 한번 모시겠습니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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