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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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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학의 전쟁 같은 삶

1급 시각장애 늑장 보고하고 중병 인정 않는 교정시설에서 10개월, 그중 121일간 징벌, 운동·접견 금지… 출소 뒤 국가인권위원회에 “억울함을 풀어달라” 진정 내고 세상 떠나
등록 2013-04-26 22:02 수정 2020-05-03 04:27

여기에서 세상의 차별과 인권침해, 폭력에 맞서 삶을 전쟁 치르듯이 고통스럽게 살다 떠난 한 사람을 독자와 함께 기억하고 싶다. 김명학씨다. 1952년생인 그는 동생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2003년 12월28일 5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002년 7월 영등포구치소에서 출소한 뒤,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가 구치소에서 자신이 겪은 인권침해에 대해 진정을 냈다. 그 결과 국가인권위원회 최초로 2003년 7월 구치소의 계구 (포승, 수갑, 사슬, 안면보호구 등 신체구속장비) 사용이 인권침해였다는 결정을 받아냈다. 그를 비롯한 몇 명의 진정과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로 교정시설 내 야만적이고 끔찍한 계구 사용 실태와 비인권적 징벌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졌고, 국가인권위원회는 법무부에 계구 사용 제도를 개선하도록 권고했다. 법무부도 일부를 수용해, 우리나라의 계구 제도가 바뀌게 되었다. 그의 용기가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둔 것이다.
계구 사용 제도 개선시켜
나는 김명학씨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동생분을 통해 그를 알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교정시설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목사님이던 동생은 나에게 김명학씨에 대한 많지 않은 기록을 건네주며 형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국가배상 소송을 의뢰했다. 나는 소송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록을 보거나 동생분의 말을 들으며 김명학씨가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성치 않는 정신과 육체로 겪어야 했던 차별과 무자비한 인권침해, 폭력에 몸서리를 치곤 했다.
김명학씨의 꿈은 교정시설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늦깎이로 신학 공부를 시작해 신학대학에 다니고, 전도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1999년 11월 뇌경색이 왔고, 2000년 7월 재발했다. 그즈음 고혈압·당뇨·고지혈증·지방간·전립선비대증·어지럼증·편마비가 있었고, 뇌경색으로 온 시각장애가 심해져서 2000년 8월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거기다 뇌경색 뒤 기질성 장애로 우울증과 불안이 심해져서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았고 인격장애·적응장애 증상마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치료를 받았고 운동도 꾸준히 했다.
김명학씨의 비극은 2001년 9월3일에 시작됐다. 그는 서울 신길동의 한 주점에 들어갔다. 소주 파는 곳인 줄 알고 들어간 그곳은 양주만 팔았다. 그는 엉겁결에 양주와 안주로 생선튀김을 주문했다. 그러다 양주를 마시는 것에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양주는 마시지 않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인에게 허리를 잡혔고, 시각장애인이라고 했는데도 가짜 시각장애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는데, 주인과 여종업원과 실랑이를 했다. 주인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경찰관들이 그를 순찰차에 태워 파출소로 강제 연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장애가 있음을 밝혔음에도 무시당했고 이에 저항했다. 결국 그는 ‘술집 주인과 종업원을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로 때렸고, 출동한 경찰관의 낭심을 잡아당겨 1주의 치료를 요하는 서혜부 좌상을 입히고, 순찰차와 파출소에서 자해를 하고, 화분을 깨뜨리는 등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내용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기소가 되었다. 하지만 술집 주인과 종업원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는 접히기 때문에 시각장애 1급인 그가 휘두른다고 해도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은 공소기각이 됐지만, 그는 공무집행방해죄로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경찰관이 1주의 서혜부 좌상을 입었다고 제출한 진단서는 의사가 소송이나 재판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서 아래 발급해준 것이었다.
55일을 수갑·사슬 채워진 채 징벌방에 갇혀
경찰은 체포 과정에서부터 그의 요구를 묵살한 채 시각장애나 그가 갖고 있는 질병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해를 한다며 그의 손을 파출소 긴 의자에 수갑으로 채워놓는 등 가혹한 조치만을 취했다. 동생이 경찰관을 찾아갔는데, 경찰관은 합의조로 300만원을 요구했다.
그해 9월6일 영등포구치소 입소 과정에서 더 큰 비극이 시작됐다. 김명학씨는 장애인등록증과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구치소에 제출하면서 장애인이고 뇌경색 등 병이 있으므로 병사에 입실시켜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외관상 중해 보이지 않는다’며 거절당했다. 그는 계속 요구했고 요구가 계속 묵살되자, 그에 대한 항의로 플라스틱 식기를 깨뜨려 자해를 했다. 자해는 체포시 자해했던 손목의 상처가 터진 정도였다. 그러자 교도관은 그에게 수갑을 채워 조사실에 수용해버렸다. 소변이 마려워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으나 교도관은 “수갑을 채운 사람이 퇴근했으니 돌아오면 풀어달라고 하라”고 했다. 그때 순시를 돌던 계장이 그에게 “이 새끼는 뭐냐, 잠을 안 자고”라고 욕했다. 김명학씨가 항의했는데도 계속 욕을 하자, 그는 계장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는 보안과 지하실로 끌려가 얻어맞은 뒤, 사슬이 추가로 채워졌다. 그날 이후 그는 55일을 꼬박 금속 수갑에 사슬까지 채워진 채 징벌방에 짐승처럼 갇혀 있었다. 그 상태로는 손을 움직일 수 없고, 용변도 보지 못하고, 밥도 먹기 곤란하고, 씻을 수도 없다. 모포에 앉는 것도 금지됐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도 1시간을 견디기 힘든 징벌이었다.
그 뒤로도 김명학씨는 10개월의 구금 기간에 121일을 징벌받고 운동과 접견이 금지된 상태로 지냈다. 그 이유는 모두 사소한 싸움이나 자해였다. 구치소는 11월19일에야 그가 1급 시각장애인이라고 보고했다. 구치소는 그때까지도 그에 대해 건강검진을 진행하면서 시력이 정상이라고 판정했다. 엉터리 검진이었던 것이다. 징계시에도 그의 건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정신과 상담도 이뤄지지 않았다. 10개월의 구금 생활로 김명학씨의 정신과 육체적 건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됐다. 혈당 수치와 혈압은 극히 위험한 상태였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불면증과 우울증도 심했다. 출소 뒤 그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2003년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출소 뒤 숨을 거두기 전까지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직접 찾아가서 그가 겪은 일에 대해 진정을 냈다. 그는 병원에서 숨을 거두기 전 동생에게 삐뚤빼뚤한 큰 글씨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유서와 같은 편지를 썼다.
못 이룬 꿈과 용기, 고통을 기억하며
구치소 쪽은 재판 과정에서 교도관들의 행위에는 아무 잘못이 없었고, 관규 위반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고 주장했다. 고인과 유족에 대한 사과는 전혀 없었다.
나는 김명학씨를 기억하며 매년 적은 돈을 그의 이름으로 장애인단체에 출연하려고 한다. 교정시설의 장애인 처우 개선과 관련해 활동한 분에 대한 지원을 바라며. 못 이룬 그의 꿈과 용기, 그가 겪었을 고통을 기억하고,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반성을 거기에 담고자 한다. 당신의 용기는 우리를 좀더 인간적이게 만들었습니다. 부디 차별 없는 세상에서 영면하소서.
이은우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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