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 말하고 싶지 않다. 상식과 역사의 패배다. 달리 설명할 능력이 없다. ‘빵’을 명분 삼아 쿠데타와 독재를 일삼았던, 무덤속의 과거가, 완벽하게 복권됐다. 그것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참혹한 역설이다. 앞으로 5년, 이걸 토대로 삶을 꾸려야 한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두렵다. 바닥 모를 심연 앞에서. 낯선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섣부른 느낌표보다 많은 물음표가 필요한 시간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다시 시작하자. 다수 유권자의 선택은 늘 올바른 것으로 간주된다. 그게 다수결 대의민주주의의 규칙이다. 그러니 다수의 선택이 ‘내 선택’과 달랐다고 원망하거나 비난할 일이 아니다.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다수당이 된 데 이어 이번 대선에서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당선돼,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하게 됐다. 이로써 한국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의 축이 한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었다. 적어도 시스템 차원에서는 대의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견제와 균형’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어렵게 됐다. 기운 축을 바로잡을 기회는 당분간 없다. 전국 차원의 선거는 가장 이른 게 2014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다. 다음 총선은 2016년 4월, 대선은 2017년 12월이다. 그때까지는 ‘시민정치’와 ‘거리의 민주주의’로 기운 축을 보정해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 정권 교체 여론이 높았다. 그러나 다수 유권자들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교정할 대안으로 야권의 문재인 후보가 아닌 집권당의 박근혜 당선인을 선택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문 후보가 우세한 지역은 서울·호남뿐이다. 영남에서 박 당선인의 압승을 이유로 지역주의를 떠올릴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지역주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경기·강원·충청권에서 박 당선인의 우세를 고려하면 그리 볼 일만도 아니다. 한국 정치에 압도적 보수 우위 구조를 창출해낸 ‘3당 합당 체제’, 곧 ‘기울어진 경기장’론이 상대적으로 설명력이 높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둘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한 새 변수를 주목해야 할 듯하다. 바로 인구구조의 고령화에 연동된 ‘세대 전쟁’이다. 20~40대에선 문 후보가 우세했다. 반면 50대 이상에선 박 당선인이 문 후보를 압도했다. 특히 89.9%라는 경이적 투표율로 박 당선인에게 표를 몰아준 50대의 선택이 결정적이다.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 사회에서 누군들 불안하지 않고 불만이 없겠느냐마는, 부모 세대의 ‘불안’이 자식 세대의 ‘불만’을 압도한 셈이다. 깊이 고민해 규명해야 할 일이다. 다만 12월19일 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박정희의 사진을 들고 열광한 시민들, “다시 한번 ‘잘살아보세’의 신화를 만들겠다”는 박 당선인의 당선 인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단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빵’을 향한 욕망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압도했다고. 박정희가 김대중·노무현을 이긴 셈이라고. 박정희식 성장주의 패러다임의 위력은 여전하다. ‘빵’과 ‘자유’의 공생은 아직 한국인의 것이 아니다.
나라 밖 상황은 더욱 엄중하다. 동북아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 일본에서 ‘A급 전범 용의자’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자 극우 정치인인 아베 신조가 총리로 돌아왔다. 북에선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로 판을 흔들려 하고, 남에선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 당선인이 됐다. 혁명 원로의 2세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까지 포함해 동북아에 ‘21세기판 세습정치’의 전성시대가 열린 셈이고, 20세기 냉전 질서가 복원될 위기에 처했다.
나라 안에선 민주주의가, 나라 밖에선 평화가, 바람 앞의 등불 처지다. 두렵다. 그래도 삶은 계속돼야 하고, 시간은 무심히 흐를 터. 사람의 일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 시간의 일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오래도록 절망하지 말기.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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