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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반발·내전 선동·법치 유린… ‘엘리트’의 실패

등록 2025-01-10 21:54 수정 2025-01-16 06:10
지난해 10월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서 열린 제79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지호 경찰청장,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해 10월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서 열린 제79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지호 경찰청장,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뉴스부터 확인하는 날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있다. 일상은 도파민 중독 때보다 더 자주 멈칫한다. 역시 뉴스를 보기 위해서다. 알고자 하는 소식은 오로지 하나다. ‘체포됐나?’

하지만 우리가 한 달 넘게 확인하고 있는 뉴스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소식을 배반하는 것들뿐이다.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은 체포는커녕 관저 철조망 안에 숨어 내전을 선동하면서 추악하게 뻗대고 있다. 그를 배출한 정당은 윤석열과 극우 지지층 사이에 서서 반국가적이고 위헌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다. 그가 임명한 내각은 정당한 체포영장 집행마저 훼방하며 법치를 유린하고 있다. 여기에다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 성향 언론사는 폭설에도 굴하지 않고 서울 한남동 관저 앞 거리에서 밤을 새워가며 윤석열 체포를 촉구한 ‘키세스 시위대’를 ‘10차선 도로를 점거한 불법 시위대’로 낙인찍었다. 이들의 천박하고 비인간적인 행태에 단호하게 분노하기 위해서라면, 시민들도 이제는 정말 법규범과 평화의 경계선을 넘어서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현실은 어쩌면 엘리트 위임 정치의 한계에서 비롯한 일일지도 모른다. 12·3 내란사태 이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이번 사태가 단순히 윤석열이라는 한 개인의 광적인 망상에 의해서만 작동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해 의회를 마비시키려 한 일과 ‘국회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계엄 포고령 1항만으로 이미 내란죄가 성립한다는 당연한 사실마저 부인하는 엘리트 정치인과 법조인들, 윤석열의 내란에 동조하며 정치적 정당성을 모두 잃어놓고도 여전히 국회가 의결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헌법재판관 임명마저 거부한 서울대 출신 엘리트 관료들(심지어 그중 한 명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자신이 ‘하버드 졸업생’임을 자랑한 이력도 있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샤머니즘에 빠져 신점까지 쳐가며 선거관리위원회 장악에 앞장선 육군사관학교 출신 엘리트 장교들이 광적인 망상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행태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적 가치는 쉽게 부정되고 있다. 내가 그동안 옳은 것이라고 배워온 사회적 가치와 규범이 무너진 혼돈 상태, 우리는 이걸 아노미라고 부른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에 따르면, 아노미는 순응과 의례, 도피라는 무대응 혹은 수동적 대응을 부르기도 하지만, 개혁과 저항이라는 능동적 대응을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2025년의 한국 사회에서 시민적 개혁이나 저항은 지금의 참담한 실패를 ‘특정하고도 괴상한 엘리트’들의 실패가 아니라 이제까지 엘리트들에게 위임해온 정치 전반의 실패로 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가 제대로 운용되고 있다고 믿었던 엘리트 중심의 정치체제 자체를 거부하고 전복하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서울 전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2025년 1월5일 오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 ‘노동자 시민 윤석열 체포대회’ 농성장에서 은박담요를 두른 ‘키세스 시위대’ 시민들이 소시지를 나눠먹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서울 전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2025년 1월5일 오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 ‘노동자 시민 윤석열 체포대회’ 농성장에서 은박담요를 두른 ‘키세스 시위대’ 시민들이 소시지를 나눠먹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번호 표지이야기를 보면, 35살 간호사 김도영씨는 꼬박 12시간 야간 근무를 마치고도 ‘키세스 시위대’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는 “누구라도 여기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정말 절망해야 하는 순간은 모두가 평화로워 보일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규범과 평화의 경계선을 넘어서려는 시민들의 개혁과 저항 정신이 이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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