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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선언

등록 2025-03-01 13:46 수정 2025-03-05 14:29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월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 개발 비리 및 성남에프씨(FC) 후원금 의혹 사건 1심 속행공판에 출석하며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월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 개발 비리 및 성남에프씨(FC) 후원금 의혹 사건 1심 속행공판에 출석하며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중도보수’ 선언이 한국 정치를 흔들고 있다.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의 소속 정당인 국민의힘이 윤석열의 손을 잡고 오른쪽 끝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재빠르게 빈자리를 선점하겠다는 정치 전략이다. 자신을 둘러싼 사법리스크와 비이재명계의 ‘일극주의’ 비판도 한꺼번에 주변화했다. 정치에서는 아무래도 난해한 법적 쟁점이나 지난한 권력 다툼보다는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가치 선언이 더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원래 중도보수 정당이었고, 이 대표의 선언 역시 평소 입장과 다르지 않기에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라는 반응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두 가지를 간과한다. 하나는 이 대표의 선언이 나온 시점과 그 내용이다. 시민들은 윤석열의 12·3 내란과 그 이후에 나온 극우 세력의 준동에 응원봉을 들고 석 달째 맞서고 있다. 그러면서 차별과 혐오, 불평등에 맞서 싸우자는 급진적인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거리에 쏟아졌고, 남태령 농민, 장애인, 조선소 하청 노동자, 호텔 정리해고 노동자의 시위 현장에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연대가 이뤄졌다. 그런데 윤석열 파면 이후 대권을 잡을 가능성이 가장 큰 정치인이 하필 이 시점에, 그것도 ‘중도보수’라는 정치 지향을 선언했다는 건, 그가 앞으로 펼칠 정치에 ‘응원봉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쉽지 않으리라는 의미가 된다.

다른 하나는 이 대표의 선언이 앞으로도 최소 3년 이상은 거대 양당 체제가 공고한 정치 구도에서 나왔다는 점이다.(다음 총선은 2028년 4월이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지난 두 번의 총선에서 나란히 위성정당을 만들어 선거제도 개혁을 해킹했다. 이 대표는 이번에 ‘중도보수’를 선언하며 “정의당, 민주노동당 이런 데가 진보정당”이라고 말했다. 진보 정치는 진보정당이 알아서 하라는 취지인데, 정의당은 의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표가 정권을 잡으면, 극우와 중도보수만이 남은 의회와 중도보수를 표방한 정부가 결합한 정치 구도만 남는다. 저소득층 노동자와 붕괴된 자영업자,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 등과 같은 소수자의 삶은 방치될 우려가 크다. 이 대표의 ‘중도보수’ 선언 이전부터 상속세와 종합부동산세 완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가상자산 과세 유예 등으로 부유층과 중산층을 위한 세제 혜택에 몰두하는 민주당의 모습이 앞으로 기본값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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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급격히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정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어져 시민들의 빈곤과 고립을 낳고, 불안과 공포, 분노를 유발하게 된다. 고스란히 세계적인 극우 정치 부상의 토양으로 꼽히는 현상들이다. 윤석열이 유발한 극우의 준동이 윤석열 파면 이후의 정치에서 더욱 확산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대표의 선언이 영리한 정치 전략에 대한 평가로만 멈춰선 안 되는 까닭이다. 탄핵과 파면 이후의 정치가 또다시 환멸의 디스토피아가 될 순 없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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