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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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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왕’은 없다

등록 2025-01-31 20:27 수정 2025-02-04 13:39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2월3일 밤 긴급성명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12월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2월3일 밤 긴급성명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12월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에서 의회와 정당은 시민을 대변한다기보다는 정치인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인식돼왔다. 정당은 의회 외부에 있는 정치를 비춰주는 거울인데, 한국에서 정당은 이런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일례로, 국민권익위원회가 실시하는 부패인식도 조사에서 ‘정당·입법’ 분야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가장 부패한 집단으로 꼽혔다.

의회와 정당의 이런 정치적 공백을 한꺼번에 메워줄 존재로 늘 대통령이 호명돼왔다. 정쟁만 일삼는 정치인 vs ‘어진 왕’과 같은 대통령이라는 대립 구도에서 대통령은 정치개혁의 ‘메시아’가 돼줄 것이라는 시민적 기대를 안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정치개혁 열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노무현과 정치 혐오가 극에 달했을 때 나타난 이명박이 그랬고, 갑자기 대선 후보 반열에 올랐던 안철수도 권력 문턱까지 갔다. 박근혜와 문재인 역시 ‘어진 왕’의 기대를 안고 대통령이 됐다. 이런 정치적 반복의 절정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인기를 끌어 순식간에 대통령이 된 윤석열이다.

윤석열이 일으킨 12·3 내란은 이런 익숙한 정치 구도를 뒤집어놨다. 비상계엄 선포 2시간여 만에 계엄 해제를 의결한 의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신뢰도가 높은 기관으로 탈바꿈했다. 맘만 먹으면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대통령은 승자독식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준, 정치개혁의 대상이 됐다. ‘어진 왕’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제왕’을 낳을 수 있는지 모두가 비싼 대가를 치르며 학습했다.

한겨레21이 이번호에서 온라인 설문을 열고 시민 456명에게 ‘내가 살고 싶은 나라’가 어떤 곳인지 물어봤다.여기서 다수 시민은 내란의 원인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위험성을 꼽았다. 권력은 집중될수록 오용될 위험성이 크다는 점을 많은 시민이 새삼 인식하게 됐다. 다만 제왕적 대통령제에만 모든 책임을 묻진 않았다. 의회 외부에 있는 정치를 비춰주는 거울로서 정당이 기능하려면, 승자독식 선거제도에 기대 유지되고 있는 양당제를 다당제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심판의 정치’ 너머에 존재하는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광장에 나온 다양한 목소리를 남김없이 받아안을 수 있는 다원화한 정치체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관건은 두 가지다.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연대가 빛을 발하고 있는 광장의 정치에 백래시(반동)로 등장해 현실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극우 동맹의 존재다. ‘윤석열-국민의힘-조선일보-극우 유튜브-보수 기독교계-극우화된 젊은 남성’으로 묶인 극우 동맹은 파시즘 양상을 드러내며 민주공화정을 위협하는 동시에 정치개혁 담론의 유통까지 틀어막고 있다. 파시즘에 대한 대응 방법은 “역사적으로 볼 때 단 하나,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뿐”(김민하)이다.

또 하나는 의회의 백래시다. 한국의 거대 양당은 선거제도의 비례성 강화라는 시민사회의 오랜 숙원을 번번이 배반해왔다. 의회가 이번에도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만 매몰된다면 대응 방법은 단 하나, “헌법이나 선거법 개정, 선거구 획정을 국회 밖에서 논의해서 국회에서 표결만 하는”(박원호) 직접 민주주의 정치 실험뿐이다. 내란 이후의 오늘 같은 기회가 여러 번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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