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새누리당은 진즉 박근혜씨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고, 민주통합당은 문재인씨를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당이 없는 안철수씨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통합진보당의 이정희씨도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바야흐로 대선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굴욕스런 내 생애 첫 선거
나는 1983년 4월 군대에 끌려갔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육군 21사단, 백두산 부대가 내 소속 사단이었다. 남자들이 군대 얘기를 하는 것에 질려 하는 편이지만, 내 생애 첫 선거는 언제였던가를 생각해보니 당연히 군대에서 25살 나이에 했던 선거다.
신군부세력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뒤에 치러진 사실상의 첫 번째 총선이라 할 수 있는 제12대 총선(1985년), 그때는 전두환이 당 총재로 있던 민주정의당(민정당)과 관제 야당이던 민주한국당(민한당) 등이 있었다. 사실상 신군부가 정치를 모두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총선을 불과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김영삼씨 등 정통 야당 세력이 신한민주당(신민당)을 만들었고,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씨가 총선 나흘 전에 귀국하자 2월12일의 총선 열기가 달아올랐다. 총 276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던 민정당은 148석, 민한당은 35석을 얻은 반면 신생 정당인 신민당은 서울·부산·대구·인천 등의 도시 지역에서 압승을 하며 67석을 얻는 돌풍을 일으켰다. 비록 의석수에서는 집권 여당이 다수당이 되었지만 이런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고, 야당 세력은 이에 자신감을 얻고 직선제 개헌 투쟁을 전개하며 2년 뒤에는 6월 항쟁으로 발전하는 정치적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당시 군대에서는 야당에 표를 찍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부재자투표일이 다가오자 대대장은 공언을 하고 다녔다. 반란표가 나오면 반드시 응징을 하겠다고 눈을 부라리며 말하곤 했다. 대대장은 광주에서 자신이 얼마나 용감무쌍하게 폭도들을 진압했는지 자랑하던 이였고, 화가 나면 권총을 빼들고 난리치곤 하던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지휘관이었다. 그런 그가 단 하나의 야당 표도 허용할 수 없다고 공언을 했다.
대대 전체의 시선은 나와 같은 강제 징집자에게 쏠렸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끌려온 우리 같은 강제 징집자가 우리 소대를 비롯해서 대대 전체에 여러 명이 있었다. 중대장은 특별히 우리를 불러놓고 괜한 허튼짓을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부재자투표를 하는 유권자에게 보내는 선거 홍보물은 보지도 못했다. 부재자투표는 중대 행정실에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심 야당에 표를 찍겠다는 전의는 사라졌다. 중대 인사계가 여당 찍는 곳만 보여주고 찍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가 대대에 난리가 났다. 대대 전체를 통해 반란 1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대대장은 대대원 모두를 연병장에 집합시키고는 배신자와 같은 부대에서 살 수 없다며 반란표가 나온 12중대에 완전군장 집합을 명했다. 그들은 밤새도록 연병장을 뺑뺑이 돌아야 했고, 반란표의 주인공은 다른 부대로 전출됐다. 그 주인공 역시 강제 징집자였다. 그는 양심대로 야당을 찍은 것이고, 나는 소신을 꺾고 시키는 대로 여당을 찍었다. 나의 첫 투표 기억은 굴욕이었다.
낙천낙선운동이 가져다준 자신감
아마 제대로 된 선거를 한 것은 1987년 대선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도 KAL기 폭파 사건과 김대중·김영삼으로 갈린 야당 후보 때문에 전두환과 육사 동기인 노태우가 당선된 대선, 17년 만에 국민들이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았지만 구로구청 항쟁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부정선거로 얼룩진 선거였다.
그 뒤에도 60만 대군의 표는 고스란히 집권 여당 표가 되는 상황은 이어졌다. 1992년 3월22일 밤, 육군 9사단 소속의 이지문 중위가 당시 서울 종로5가에 있던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군부재자투표 과정에서 간부들이 여당 후보 지지와 공개투표를 강요했다”고 폭로했다. 선거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이지문 중위는 이 양심선언으로 이등병으로 강등돼 강제전역을 당했다(그는 그 뒤 4년여의 법정투쟁 끝에 1995년 8월 대법원으로부터 파면 취소 및 취소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의 폭로로 군대 내에서 하던 군부재자투표는 영외에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후 나는 대선, 총선, 지방자치 선거 등을 몇 번씩 치렀다. 그리고 몇 번의 선거에는 아예 투표소도 가지 않았다. 내 지역구에는 영 마음에 드는 후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후보들이 난립하는 선거에서 기권도 의사표시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나의 이런 생각은 바뀌었다. 2000년 치러진 제16대 총선에서는 시민단체들이 낙천낙선운동을 전개했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은 공명선거 감시운동을 주로 해왔다면 이때는 더 적극적으로 정치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불복종운동 전술을 택한 것이었다. 전국의 시민단체들은 총선시민연대를 꾸리고 선거법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당시 선거법에 따르면, 선거 기간 중에 노동조합을 제외한 단체들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고 낙선운동과 사전 선거운동도 금지됐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니 축제니 하더라도 우리나라 선거법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선거운동을 일방적으로 규제하는 내용으로 그득했다. 마치 프랑스 시민혁명 때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을 구분하고 능동적 시민에게만 선거운동을 할 자격을 주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으로 공천을 반대한 일부 정치인들이 정계 은퇴를 하도록 하거나 선거 불출마를 하도록 만들었고, 시민의 힘을 의식한 정당들이 공천 반대자들을 상당수 공천에서 제외했다. 시민단체의 압력이 정치권을 변화시킨 것이다. 낙선운동 결과 당시 낙선 대상자 86명 중에 59명이 떨어졌으니 낙선율이 무려 70%에 육박했다. 그리고 일부 선거법을 개정하는 성과도 냈다. 이 시민불복종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시민의 힘으로 정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의 대상이기만 한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했고, 나도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선택하자는 태도로 바꾸게 했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투표의 자유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군에서 야당에 종북 세력이 있다는 식의 교육을 선거 시기에 진행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이 선거 당일에 근무하느라 투표할 수 없거나, 선거 때마다 요구하는데도 투표 당일 장애인 접근권이 보장되지 못해 장애인이 투표할 수 없거나, 사회복지시설에서 시설장이 무더기 투표를 유도해 사실상 공개투표를 하는 일은 없는가? 아직도 공천·선거 과정에서 금품이 오고 가는 일이 적발되고,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선거 때마다 당선되는 단체장이 감옥에 가서 보궐선거를 치러야 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모든 행위가 국민의 선택 권리를 방해하는 범죄다. 이번 선거 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선거관리위원회나 정당이 제대로 준비했으면 한다. 선거에 참여하는 권리조차 행사하지 못할 때의 비참함을 맛보는 선거는 최소한 아니었으면 한다.
한때 선거에 무심했던 내가 이번 대선에는 인권이란 가치로 대통령을 선택하자고 책도 냈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무척이나 중요할 것이다. 현 정권이 부자와 토건세력 위주의 정책을 시행하다 보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중병에 걸린 환자 꼴이 되었다. 중병을 치료할 수 있는 대통령을 어떻게 뽑을 것인가.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현상은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배에 육박하는 명실상부한 1위라는 점이다. 하루 42.6명이 자살하는 나라, 1년이면 1만5천 명 이상이 자살로 죽어가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각종 강력 대책이 있음에도 흉악범죄는 더욱 늘어만 간다. 성폭력 범죄 대책으로 내놓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설치도, 전자발찌도, 화학적 거세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게 이미 입증됐는데 다시 사형 집행과 보호감호제를 부활하자고 하고, 이번 기회에 불심검문을 부활한다고도 한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아예 물리적 거세 법안까지 제출했다.
이런 즉흥적인 대책들로는 자살 행렬도, 흉악범죄도 줄이지 못한다. 자살이든 살인치사 범죄든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다. 이미 해답은 있다. 단지 그것을 사람들이 또는 정치권이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안심하고 제 수명을 다 살 수 있는 사회, 인간이 존엄하다는 평범한 진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대통령을 뽑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려면 경제도 복지도 평화·안보 문제도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사람이 생계의 위협이나 공포 때문에 살 수 없는 것만큼 더 심각한 문제는 없다. 그래서 이번 대선, 대통령의 선택 기준은 인권이다.
다시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런데 대선 후보들이나 대통령이 되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게 국민이다. 유권자가 선거 한 번 했다고 손 놓고 있을 때, 복지국가를 주창하던 대선 후보가 재벌들의 눈치나 보는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시대 철학자 루소의 말은 지금도 소중하다. “그들(영국 인민이)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돼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돼버리는 것이다.”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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