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잘못 들었다. 경기도 화성 봉담IC에서 업데이트가 안 된 내비게이션은 새 길을 몰랐다. 차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봉담요금소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애먼 돈을 날리고 요금소 쪽 길로 돌아나왔다. 그렇게 길을 잘못 들었으면 돌아나오면 될 일. 그러나 헌책방 주인을 국가보안법(보안법) 위반 혐의(찬양·고무죄)로 불구속 기소한 수사 당국은 그러지 못했다. 1심에서 무죄가 나온 그를 데리고 2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갔다.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비유컨대 잘못 들어간 봉담요금소에서 전남 목포까지 간 셈이다.
헌책방에까지 미친 보안법의 망령
무엇 때문이었을까. 업데이트가 안 된 검경 때문이었을까. 시대착오적인 보안법 자체의 문제였을까. “정권 말기에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된 경찰이 사건을 만들려다 무리수를 둔 거죠. 거기에 검찰도 부화뇌동한 거고. 근데 무엇보다 진작에 없어져야 할 악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이 문제였죠.” 3년여에 걸친 어처구니없는 ‘악몽’을 회고하며 헌책방 ‘남문서점’의 주인 윤한수(44)씨는 쓰게 웃었다.
헌책방에까지 보안법의 망령이 뻗친 것은 지난 2007년 5월이었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문 부근에서 10년 넘게 책만 팔아온 그에게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기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소속인 그들은 “공산주의를 찬양·선전하는 책을 팔고 있다”며 책을 바닥에 놓고 사진을 찍어댔다. 며칠 뒤 다시 나타난 경찰은 중학생 권장도서인 의 초판본 등 79권의 책을 ‘불온서적’이라며 압수해갔다. 그중엔 스테디셀러로 알려진 조성오의 , 막심 고리키의 , 파울로 프레이리의 도 들어 있었다. 기자의 책장에도 있는 책들이었고, 대부분 대학이나 국회도서관에서 빌려주는 ‘고전들’이었다. “황당했죠. 처음에는 이게 죄가 되나 싶었어요. 근데 20평 넘는 공간에서 의자 하나 달랑 놓고 5시간씩 조사를 받으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경찰이 제시한 자료를 보니까 내사를 쭉 해온 거예요. 헌책방 홈페이지를 캡처한 출력물을 들이밀면서 원하는 바대로 얘기하게끔 끈질기게 물었어요. 누구나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책을 팔았는데 무슨 죄가 되느냐고 항변했지만 씨알도 안 먹히더라고요. 마치 각본대로 진행하는 것 같았어요.”
그의 가게 2층에 세들어 살다 헌책방 노하우를 전수받고 인터넷 헌책방을 개업한 늦깎이 대학원생 김명수씨도 윤씨와 같은 혐의로 같은 날 조사를 받았다. 윤한수씨가 도매한 책들이 그 둘을 엮은 ‘고삐’가 된 것이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같은 해 10월 윤씨를 보안법 위반 혐의(찬양·고무죄)로 불구속 기소했다. 2003년 9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불온서적 32권을 팔고 79권을 소지한 혐의였다. 10여 차례 재판이 이어졌다. 그를 도우라고 국가가 보내준 국선변호사는 “검경이 제시한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집행유예라도 받자”며 오히려 검찰을 변호(?)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변호인마저 이랬다면 눈앞이 캄캄했을 터. “전문가가 붙어서 논리적으로 싸워야 되는데 집행유예라도 받으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죠. 그래서 국선변호사 선임을 취소하고 몇 군데 변호사 사무실에 문의했어요. 근데 지방이라 그런지 다들 국가보안법은 잘 모른다며 난색을 표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없이 건너서 아는 변호사와 재판을 했죠. 그분이 국가보안법에 걸려본 분이라 국선변호사보다 더 잘 알더라고요. 하하.” 그에게 국가는 오로지 가해자 역할만 했다.
검경이 만들어준 정치적 각성효과
재판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는, 검경이 문제 삼은 ‘불온서적’이 국립중앙도서관 등지에서 쉽게 대출받는 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국립중앙도서관 장서 목록을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2009년 9월30일 수원지법 형사9단독 김양훈 판사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을 모두 종합해보더라도 피고인의 행위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만한 것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코미디 같은 재판은 이걸로 끝이 난 줄 알았다. 그러나 망령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판결문을 정밀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던 검찰은 항소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위해서라도 검찰이 항소하지 않을 거라 믿었죠. 제가 순진했더라고요.” 2010년 말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고서야 그를 괴롭히던 보안법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그와 같이 연루된 김명수씨는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저 먹고살려고 책을 판 것뿐인데 졸지에 보안법 위반자가 되어 대법원까지 불려다녔으니 울화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듯도 싶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사실 저도 몇 달 동안 소송을 고민하다 포기했어요. 경찰서나 검찰의 수사기록을 모아야 하고, 변호사도 선임해야 하고, 무엇보다 다시 이 일로 다투는 것에 지쳤어요. 소송을 해서 이긴들 보상금을 많이 받는다고 누가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의 웃음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사실, 그는 재판 과정 동안 친지들에게 자신의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고향 경남 진주에 계신 어머니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른다. 착하고 순한 아들이 갑자기 ‘빨갱이’가 됐다고 하면 놀라 쓰러지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그렇게 외롭게 악법과 싸웠다. “한번은 하도 억울해서 수원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했어요. 지방지 기자 몇 명만 달랑 왔더라고요. 우리끼리 하는 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맥이 빠졌죠. 지금처럼 트위터라도 있었으면 덜 외롭고 힘들었을 거예요. 거기에라도 하소연하면 어느 정도 풀렸을 테니까요.” 말마따나 그는 요즘 트위터에 열심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희망버스’에도 올랐고,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도 다녀왔다. 최근에는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뚜벅이’ 집회에도 참가했다. 재판이 그를 변화시킨 것일까. “어처구니없는 일로 재판을 받고 나서 생활이 많이 변했죠. 국민을 탄압하는 권력에 맞서 참여하는 일이 더 많아졌어요. 내가 직접 당해보니까 이게 아니구나 알게 된 거죠. 저도 사회적 약자지만 저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그가 사회의식과 처음부터 담을 쌓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책 파는 일을 하다 보니 그도 자연스럽게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강준만·한홍구·박노자 교수의 책을 즐겨 읽었고, 신동엽·김수영·신경림 시인의 시를 좋아했다. 최근에는 손석춘 전 논설위원의 책과 김용준의 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검경의 ‘닭짓’은 인문학적 소양이 있던 한 시민이 사회운동에 함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
책은 그 사람의 시대이자 역사
그를 감옥 문 앞에까지 가게 했던 책과의 인연은 우연이었다. “서울에서 아는 분이 서점을 했는데 도와주다가 이 일에 들어섰어요. 수원 남문에 와서 헌책방 남문서점을 연 것이 97년이었죠. 그곳에서 책 팔아 번 돈으로 자식 낳고 기르며 재밌게 살았어요. 책 좋아하는 분들이 구라가 많잖아요. 와서 말벗도 하다 가고, 술 좋아하는 단골들은 같이 술도 마시고 즐거운 시절이었죠.” 지난해 겨울, 그는 서가마다 추억이 서린 그곳을 떠나 원래 창고로 쓰던 지금의 화성시 봉담으로 와야 했다. 반토막 난 수입에 월세를 부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남문서점은 인터넷 헌책방(www.ibuybook.co.kr)으로만 남았다. “서점업계가 다 힘들어요. 인터파크, 예스24, 알라딘 같은 대형 인터넷 서점들이 죄다 헌책을 파니까 경쟁이 안 되죠. 자본력으로 뛰어드니까 버티기 힘들죠. 헌책방을 많이 이용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러다 다 없어져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의 말처럼 사실 헌책방은 단순히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동네의 사랑방이다. 사람이 책으로 소통하는 문화공간인 셈이다.
60여 평 그의 창고는 웬만한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양쪽 서가에 가득한 책 말고도 창고 입구엔 책이 산더미였다. 대부분의 사물이 그러하지만 책은 눈대중만으로 몇 권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한 20만 권 될 거예요. 이곳 말고도 옆 컨테이너 창고에 있는 책까지 더하면. 그 가운데 10만 권은 인터넷에 등재조차 하지 못했어요. 하루 동안 꼬박 등재 작업을 해도 100종의 책을 작업하기 어려워요. 서지 사항과 책의 상태까지 일일이 기입하면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리죠. 실은 이보다 더 많았어요. 얼마 전에는 20t가량을 종잇값만 받고 팔았어요. 놔둬봐야 안 팔릴 책들이라서요. 트럭에 책이 실려갈 때, 맘이 안 좋았죠.” 누군가로부터 사 모았을 그 책들을 헐값에 내주는 기분이 어떠했을까.
“저는 별일 아닐지 몰라요. 저희한테 책을 파는 분들의 사연에 짠할 때가 많죠. 저희가 책을 사면 통째로 많이 사거든요. 이민(이사) 가는 분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형편이 어려워 파는 분들이 서운해하죠. 한 권씩 사서 모은 거잖아요. 그걸 한꺼번에 팔려니 마음이 영 허전해서 눈물을 보이는 분도 계시죠. 사는 저희도 마음이 아프죠.” 그렇다고 남의 책을 사는 일이 늘 애달픈 것만은 아니다. “남의 서재를 둘러보는 일은 늘 설레고 즐거운 일이에요. 서재의 책을 쭉 보면 그 사람이 보이거든요. 이 사람은 이런 생각으로 살았구나,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대충 감이 오죠. 책은 그냥 사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대고 역사잖아요.” 자신이 읽은 책이 자신을 만든다고 했던가.
20만 권을 소유한 헌책방 사장의 서재는 어떤 모습일까. “집에도 책이 많죠. 제 방에 책장이 9개, 아이들 방에도 9개 있어요. 빈틈없이 책을 꽂아도 자리가 없어서 그냥 쌓아둔 책도 많아요. 제가 좋아하는 한국 근현대사 책과 소설, 시집이 많고 아이들 책도 많이 있죠. 저 빼고 다들 싫어하죠. 원래 그렇잖아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만 좋아하고 가족들은 책 많은 거 싫어하죠. 하하.” 막내아들을 빼고 두 아들과 두 딸은 어릴 적에는 책을 좋아하더니, 이젠 시큰둥해 걱정이라는 그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은 한다고 했다. “사실 저를 기소한 경찰과 검찰도 평상시에 책을 가까이했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책을 멀리하면 위험해진다고 생각해요.” 무식자들도, 악법도 여전하다.
단골들이 ‘논문 잘 썼다’고 할 때 보람 느껴
책 속에 사는 그에게 기억에 남는 책을 물었다. “어릴 적에는 다들 그랬지만 먹고살기 힘들어서 책이 귀했어요. 그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가 기억에 남아요.” 대학원 다니는 단골들이 ‘덕분에 논문 잘 썼다’고 할 때 보람을 느꼈다는 그를 보며 남문서점이 다시 남문으로 복귀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 단골들과 즐겁게 해후할 수 있기를, 책 읽기보다 책 사기를 좋아했던 기자는 바랐다.
화성=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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