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의 마지막에서 다룰 내용은 ‘타자성(他者性)과 신앙’에 관한 문제다. 어떤 대상을 낯선 존재로 바라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발생하는 신앙의 효과에 관한 얘기다. 이것은 한국 그리스도교를 위기로 내몰았고, 또한 한국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의 장으로 남게 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타자인가’에 관한 해석에 있다. 이 글은 이 질문을 따라가며 한국 그리스도교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려 한다.
장애인·동성애자·이주민의 교회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를 담임하는 김홍도 목사는 시민후보 박원순씨를 가리켜 “서울에 사탄 마귀에 속한 사람이 시장이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폭언을 했다. 이것은 그가 박원순씨를 친북주의자로 전제하며 한 말이다. 또 기독당 창당의 핵심 인물인 전광훈 목사는 “내 앞에서 빤쓰 내릴 수 있는 신자라야 내 신자”라는 고질적인 성폭력적 발언을 또다시 내뱉었다. 지난 ‘무상급식 주민투표’ 직전에는 온누리교회가 발신한 휴대전화 문자에 “무상급식 전면 시행을 주민투표로 막지 못하면… 초·중·고생 동성애자 급증”한다는 황당한 메시지가 전달됐다. 그리고 국외 선교를 꿈꾸는 열혈 신자들의 대표적 롤모델인 인터콥 대표 최바울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슬람과 한국 좌파들이 서로 손잡고 있다”는 기괴한 말을 던졌다. 이는 무슬림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이슬람교를 퍼뜨리려고 암약하고 있다고 말한 여러 교회 지도자들의 생각과 맥을 같이한다. 이들에게 이슬람교는 마치 독성 강한 세균 같은 것이다.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의 낯선 타자에 대한 배타주의적 발언들 중 생각나는 몇몇 사례를 이렇게 열거했다. 맘먹고 찾는다면, 2000년대 이후로만 한정해도 책 한 권은 너끈히 나올 것이다. 저들은 교회가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잡게 하기 위해 언제나 특정 대상을 폄하하고 적대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하기 위해 적대시하는 이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귀담아듣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심지어 그들의 교인조차 주의해 듣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시민사회는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런 황당한 말을 수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매체는 마치 ‘공공의 적’을 시민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 막말과 기괴한 행보를 보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신교 세력이 사회적으로 막강한 자원을 장악하는 기득권 집단이기에, 그 허튼 말과 행보는 비난하는 이에게 더욱 큰 쾌감을 준다. 요컨대 시대착오적 행보들은 교회를 위기의 수렁에 더욱 깊이 빠뜨린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한국 개신교의 주류 전통 밖에 있는 많은 교회들은, 주류 교회가 적대시하고 배제한 바로 그이들과 함께해온 오랜 전통을 가졌다는 점이다. 장애인과 함께 신앙 공동체이자 생활 공동체를 이뤄온 교회, 동성애자의 교회, 이주노동자의 교회, 탈북자의 교회, 노숙인의 교회, 기지촌 여성과 함께하는 교회, 빈민과 함께하는 교회, 무의탁 노인과 함께하는 교회 등, 그리고 딱히 교회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형태의 신앙 공동체들은 우리 사회의 불편한 타자들과 삶·생각·신앙을 나누는 모임은 사회 구석구석까지 두루 퍼져 있다.
어떤 종교·종파·사회집단에서도 이렇게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내재화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 개신교의 숨겨진 전통이다. 이 공동체의 대다수는 주류 교회의 외면과 신학의 무관심 속에 끈질기게 자생해왔다.
이 연재의 다섯 번째 글에서 보았듯이, 1954년 용문산기도원을 창설한 나운몽은 모든 것이 바닥까지 붕괴된 전후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던져진 이들의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집회를 열었다(840호 ‘치유와 기복, 개신교 성공시대 열다’ 참조). 여기서 특기할 것은 그의 집회에 모여든 이들은 비단 그리스도교인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자 천지신명이고 부처이며 각종 조상신들의 표상을 엮은, 곧 사람들 각각의 심상 속에 함께하는 신성의 이름으로, 그 신성들의 연합체인, 하나이자 여럿이고 여럿이자 하나인 신의 이름으로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 주류 그리스도교에 편입되지 못한 이 전통은 곧 사라졌고, 해석의 전문가들에 의해 언어화되는 기회를 누리지 못했으며, 훗날 주류 교회의 신앙적 규율의 망 속에서 과거의 희미한 흔적조차 유실되는 ‘망각된 역사’, 곧 비역사의 하나가 돼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글에서 나운몽의 기도원 운동은 당시 한국 사회의 도처에서 벌어진 밑바닥 살림운동을 대표하는 하나의 사례로서 재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외부화된 신앙운동들 가운데서도 타자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교는 ‘타자성’을 신앙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전제한다. 물론 이것은 ‘신의 타자성’이다. ‘신의 타자성’은, 카를 바르트가 주장한 ‘신의 절대타자성’ 주장을 가정한다고 해도, 역사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바르트는 “신은 어떤 표상으로도 역사화될 수 없고, 오직 신 자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표상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계시는 누구에게 표상되는 것이겠는가. 어떤 용어를 쓰든, 어떤 방식으로 그 과정을 서술하든 신의 타자성은 인간의 해석 범주를 벗어나서 의미를 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의 타자성은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가.
신학은 성서가 그런 해석의 한 전거라는 공리를 갖고 있다. 공리란, 입증할 길은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함으로써 사유를 이어가는 준거점이다. 민중신학은 그 타자성을 민중에서 본다. 하여 민중신학은 성서를 ‘민중의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
20여 년 전, 김지철 장신대 교수(현 소망교회 담임목사)는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본다’는 민중신학자들의 주장은 ‘민중 우상주의’와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성서를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리스도의 눈’이란 무엇인가? 형식논리로만 보면 그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조차 너무 신성화된 것, 인간의 절대타자성 범주에 있는 것이어서 해석하지 않으면 도무지 표상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논리를 넘어서 실제를 보면 ‘그리스도의 눈’은 교회주의적 관점, 바로 그것이다. 교회주의의 틀에서 익숙한 언어 내부의 것이 그리스도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 결국 여기서 논점은 ‘교회주의적 시선’과 ‘민중의 시선’, 그 각각의 눈으로 성서와 신앙을 해석하는 것에 관한 주장이다.
이 주장은 신앙이 이런 시선을 통해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주체화할 것인지의 문제를 함축한다. 그런데 앞의 두 주장은 서로 다른 주체화의 내용 범주를 말할 뿐 아니라, 생각의 방식에서도 반대의 논점을 보여준다. 전자, 곧 ‘교회주의적 시선’은 실재하는 그리스도교 제도가 담고 있는 배타주의적 틀을 가정하며 그리스도인을 주체화한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배제하고 적대시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반면 ‘민중의 시선’은 낯선 타자, 비참의 현상을 겪는 타자를 이웃으로, 아니 자신이 흠모하던 신의 표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양산된 타자들의 안식처앞에서 나는 한국의 주류 교회가 자신의 주장을 펼 때마다 ‘적’을 만들어내는 어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때 그 적은 불편한 타자들이었다. 이는 ‘낯선 타자로서의 신’을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영토인 교회의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다. 그 영토 밖의 존재를 배제하고, 그 영토에 결코 들어와서는 안 되는 존재를 가정하는 어법, 그것이 바로 교회주의의 논리다.
반면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는 교회와 신앙을 고민해온 이들은, 그이들이 어떤 언어로 신앙적 행동을 표현했든 간에, 그 타자의 눈으로 신앙을 성찰해온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민중신학적 신앙운동의 주역인 셈이다.
지구화 시대를 맞아 전세계는 극도의 양극화를 겪고 있다. 중간층이 몰락하고, 양극으로 분화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 하위 부문의 극한 지점에는 존재의 자리에서 뿌리 뽑힌 이들이 양산되고 있다. 가정에서 이탈해 떠도는 노숙인과 가출 청소년 같은 이들이 있다. 혹은 나라를 떠나 세계 곳곳으로 일터를 찾아 유랑하며 ‘글로벌 도시사회의 하인’으로 편입되는 이들이 있다. 일터에서 퇴출된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력을 상실해 불안정한 상태의 노동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점차 자신의 고통을 묘사하는 언어를 상실하고 있다. 말더듬기, 횡설수설하기, 뜬금없이 소리 지르기 등등. 그들의 부적절한 언어는 폭력적 행동으로 표출되곤 한다. 누군가를 욕하고, 가족에게 폭행을 가하고, 약한 이웃을 따돌린다. 어떤 이들은 범죄자가 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며, 불건강한 의존성을 가진 존재로 전락한다. 몸과 영혼이 자신에게서조차 박탈된 존재의 뿌리 뽑힘, 그런 상태의 사람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욱 심각하게 불편한 존재로서 우리 주위에 살고 있다. 함께 있는 것이 버겁다. 대화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몸에서 나는 악취는 혐오스러움을 더욱 극화한다. 사람들은 그들과 상대하고 싶지 않다. 지구화 시대를 맞아 타자화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타자성의 신앙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와 신앙 공동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왔지만, 우리 시대에 더욱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타자성의 신학을 펴는 담론의 의의는 어느 때보다 각별해졌다.
지난 세기 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식민지, 해방, 전쟁, 개발독재, 민주화, 지구화 등 숨가쁘게 이어지는 시대의 격랑을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고통 속에 신을 찾았고, 기독교는 그들에게 한 신에 관한 이야기를 폈다. 그 신은 고통을 겪는 이에게 나름의 탈출구를 제공했다. 또한 그 신은 탈출구를 찾은 이들에게 누군가를 공격하도록 자극했다. 한국 근대사회의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신의 사회는 이렇게 폭력적으로 자리잡아왔다. 공교롭게도 폭력적 신의 신도들은 성공을 거듭했다.
‘작음’을 추구하는 신앙운동
이제 그 신앙은 위기에 처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아주 간절히 신을 필요로 하는데, 그리스도교는 그들에게 적합한 신을 소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 신은 시대착오적으로, 괴팍한 신으로 다가갈 뿐이다.
그 탓에 사람들은 다른 신을 찾으려 한다. 하여 유일·배타성을 주장하는 신의 사회는 갔고 ‘신들의 사회’가 도래했다. 한데 신들의 사회에 등장한 다른 신들은 과연 적당한가. 아직 검증되지 않았고,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냥 종교적 행동들이 종교 영역과 종교 외부 영역을 오가며 돌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와중에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어떤 가능성이 엿보인다. 나는 ‘작음’을 추구하는 신앙운동에서 그 하나를 보았고, 타자성을 신앙화하려는 끈질긴 노력 속에서 다른 하나를 보았다. 이것은 배타적 신의 신학이 아닌, 신들과 이웃이 되고 동료가 되어 신성사회를 함께 지향하는 신과 사람에 관한 신학과 어우러지는 신앙운동이다.
*‘김진호의 신들의 사회’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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