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 교회를 살펴보기 위해 개신교의 과거 족적을 더듬고 있다. 이번 글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의 마지막이자, 지난 글에 이어 기독교 내 진보적 운동이 성장주의에 취해 있던 대다수 교회와는 다른, 의미 있는 소수로서 어떻게 비판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는지 살피려 한다. 지난 글이 제도권 내부에서 진보적 신학이 활성화되는 현상을 다루었다면, 이번 글은 개신교 사회운동과 비제도권 신학운동에 주목한다.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 각국은 급속도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식민지에서 해방된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빠른 전환기를 맞았다. 제국적 기독교(개신교)로서의 과거를 청산하려 1948년 창설된 세계교회협의회(WCC)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상황에서 ‘하느님의 선교’(미시오 데이)가 어떻게 수행돼야 하는지의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곧 ‘더 인간적인’ 산업화와 도시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산업선교론’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당시 WCC 재정의 4분의 3을 담당하던 미국 교회는 산업선교를 아시아 각국에 도입하려 인적·재정적 지원을 확대했다. 한국에서도 미국 교회의 지원으로 1957년부터 산업선교 활동이 시작된다.
한국장로교 선교가 근본주의 일색이 되도록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미국 북장로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이 퇴조하면서 매우 진보적인 WCC 운동에 북장로회가 적극 참여하게 되자, 이 교단과 내밀한 관계에 있던 한국의 다수파 개신교 세력인 대한예수교장로회도 산업선교를 수용하기 시작한다. 특히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WCC 가맹 교파인 ‘통합파’와 반대 교파인 ‘합동파’로 분할된 직후, ‘예장 통합’ 교단의 엘리트 훈련 코스로 산업선교 프로그램이 활용됐다. 한국 산업선교 운동의 또 다른 축인 감리교도 미국 교회의 영향으로 산업선교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미국과 유럽이 경험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문명론적 병폐를 알 수 없었다. 한국인에게 산업화와 도시화는 가난의 족쇄에서 해방되는 미래의 꿈으로 인식됐다. 하여 한국의 산업선교 선구자들은 산업선교를 도시의 공장 노동자가 된 이들을 기독교인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선교운동을 ‘산업전도’(Industrial Evangelism)라고 부른다. 공장을 복음화해 노동자로 하여금 근면성실하게 일하면 공장도 살고 자신도 더 잘 살게 될 거라는 복음주의적 산업화 이상을 꿈꾸게 하는 선교론이다.
하지만 산업전도 일원으로 현장 활동에 참여한 이들은 공장의 현실이 얼마나 혹독한 비인간화로 가득 차 있는지를 절감하게 됐다. 여기에 미국 교회의 산업선교론을 배우게 되면서 이들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선교 이론과 결합됐다. 1968년 동아시아교회협의회(EACC)에서 아시아 각국의 개신교 노동운동가들은 산업전도가 아니라 ‘산업선교’(Industrial Mission)의 필요성을 천명하게 된다. 이는 산업선교 운동이 정부, 기업, 심지어 어용노조인 한국노총과 대립선을 예각화하며 전개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자 대형 교회들도 산업선교에 대해 비판과 경계의 눈길을 강화했다. 개신교 실업인이 교회의 중심축을 이루던 대형 교회들은 친정부적·친기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주목이 더한 사회적 영향력
아니, 그것은 대형 교회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대형 교회를 꿈꾸던, 하여 대형 교회의 논리와 비전을 어울리지 않게 덧입고 있던 많은 중·소형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교회들은 노동자도 신의 소명을 받은 자이니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의한 권력도 신이 위임한 것이니 그 권력에 저항하지 말고 복종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니 공공연히 저항을 꿈꾸는 노동자와 산업선교 목회자를 다수의 교회들은 신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자로 보았다.
산업선교 운동은 이런 반대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지난 글에서 대형화되고 있던 교회들은 미국의 번영신학을 막 수입해 서투른 신학화의 도정에 있었던 반면, WCC 가맹 교단 중심의 진보적 신학자들이 당시 한국 신학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WCC를 중심으로 진보적 신학의 시장이 비약적으로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한데 비슷한 현상이 개신교 사회운동에서도 벌어졌다. 전후 최초의 개신교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산업선교 운동은 한국 주류 교회들의 외면과 공격에도 아랑곳 않고, 그 영향력에서는 대형 교회들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그것은 소수의 산업선교 운동이 개신교와 비개신교를 아우르는 전세계적인 저항의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종 한국의 정부와 기업에 매우 의미 있는 압력이 되었다.
개신교 노동운동뿐 아니라 개신교 빈민운동도 이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도시로 유입된 광범위한 빈민을 흡수하면서 순복음교회 같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형 교회들이 태동했지만, 수십만 명을 긁어모은 슈퍼 대형 교회들보다 수십 명에 불과한 한국의 빈민 교회들이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1973년 몇 개에 불과하던 수도권의 빈민 교회를 포함한 빈민 단체들이 모여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교회들은 그 뒤 오랫동안 개신교와 가톨릭의 진보적 유력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였다. 그렇게 이들의 주장은 개신교와 비개신교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대중매체를 통해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알려졌다.
개신교 농민운동, 개신교 청년·학생운동, 민중교회운동, 개신교 인권운동 등 1970~80년대 활발했던 다른 범주의 개신교 사회운동도 비슷하다. 각 범주의 개신교 사회운동은 모두 WCC를 포함한 미국과 유럽의 진보적 선교기구들의 인적·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고, WCC와 더불어 발전한 진보적 신학의 관심과 지지를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었으며, 개신교 안팎의 국제적 저항의 네트워크와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담론을 확산시킬 수 있었다.
한편 비제도권 신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포착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신학자를 포함한 대학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정부의 압력으로 강제 해직됐는데, 신학자 서남동은 해직된 자신을 ‘방외 신학자’라고 불렀다. 한데 방외 지식인, 전후 최초의 비제도권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재야 연구단체인 ‘한국신학연구소’로 모여 지속적인 포럼을 열었다. 이 연구소는 독일 선교단체의 후원을 받아 포럼을 운영했다. 이 포럼에서 각 분야의 ‘민중론’이 대두해 전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방외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은 한국의 진보적 신학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교회 비판적 신학 담론을 펼쳤다. 이 담론은 전세계적으로 열렬한 관심과 환영을 받았고, 이것은 그 방외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되었다.
오래된 영성 vs 새로운 영성
1980년대에 이르면 기독교 사회운동의 각 분야에서 내부 갈등이 심화된다. 전통적 기독교 제도의 특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새로운 신앙제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뚜렷이 갈등을 일으킨다. 후자는 당시 저항 담론의 또 다른 흐름을 형성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적 기조와 좀더 유연한 관계를 맺으려는 경향을 띠기도 했다.
산업선교와 수도권 특수지역선교(빈민선교)의 경우, 전통적인 기독교적 정체성을 좀더 강조하는 이들이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1988년 창립)이라는 이름으로 결속했고(민중교회 목회자 모두가 그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편은 개신교 밖 노동운동단체로 이동하거나 좀더 마르크스주의와 친화적인 개신교 사회운동 기구에서 활동했다.
청년·학생운동도 1983년을 기점으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요소에 친화적인 ‘아이덴티티 그룹’과 대안적 신앙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아이덴티티 그룹’으로 나뉜다. 후자는 1980년대 말, 대대적으로 개신교 활동가 대열에서 이탈해 마르크스주의 진영으로 옮겨간다. 방외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은 제2세대에 이르러 민중교회를 중시하는 이론가 집단과 새로운 아이덴티티 그룹의 이론적 지지 집단으로 분화된다.
1980년대 이후 분화되는 두 흐름을 이처럼 이념적으로만 나누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정념적 차원에서도 두 흐름은 서로 다른 양상을 띤다. 일부 민중교회 목회자들은 이를 ‘영성 대 사회과학(마르크스주의)’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후자를 신앙 외부로 배제하는 비난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적절한 구도가 아니다. 이념 대 이념의 대립처럼, 정념 대 정념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정념을 다르게 말하면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념적이고 이해적인 가치판단에 근거한 생각이나 행동과는 달리, 신이라고 하든 진리라고 하든 궁극적 차원과 감정적 동일시를 함으로써 생기는 정념적 열정 말이다.
전자는 ‘영성’의 전거를 교회 전통에서 찾으려 했다. 즉, 자신들의 정념적 열정을 설명하기 위해 교회 전통에서 유래한 영성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 ‘잘 제도화된’ 신앙제도와 신학 담론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덜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성공지향적 교회의 영성과 민중교회의 대안적 영성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자칫 이 정념은 교회주의화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반면 후자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처럼 ‘새로운 우물에서 새로운 영성을’ 찾으려 했다. 곧 그들의 정념적 열정은 이제까지의 교회적 영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출발해 영성의 창조적이고 발본적인 쇄신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것이기에, 그 자부심은 끊임없는 정체성의 혼란을 자초해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1980년대 말 이후 개신교 사회운동과 비제도권의 민중신학운동이 활력을 잃어버리자 교회적 영성을 주장한 많은 이들이 주류 교회의 가치에 흡수돼버렸고, 새로운 영성을 주장한 많은 이들은 개신교를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대안적 가능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양쪽에서 존속하며, 의미 있는 소수로서 남아 있다. 이 경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이야기할 것이다.
쇠락도 서구 진보적 교회와 함께
아무튼 1970~80년대 제도권 안과 밖의 진보적 신학운동과 개신교 사회운동은, 급성장을 구가하며 사회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대형 교회와 그들의 권역에 흡수되고 있던 다수 교회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심과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형성에도 결코 작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다. 한국 사회의 개혁 담론과 민주주의 담론에서 개신교 진보는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대형 교회의 성공주의와는 다른 의미에서 개신교 진보는 소수임에도 성공한 이력이 있다.
이 다른 성공의 이력은 한국 교회들로부터 거의 지지와 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서양 개신교와 신학의 왕성했던 진보적 흐름에 편승함으로써 가능했다. 이것은 교회적 영성을 강조한 이들이나 새로운 영성을 강조한 이들 모두에게 나타난 공통된 한계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서양의 진보적 개신교 쇠퇴는 한국 개신교 진보운동의 쇠퇴로 나타났다. 이는 대형 교회의 성공주의와는 ‘다른 성공’을 숙고하고 발견하려고 열정을 다했던 것과는 다른 사고와 실천, 곧 ‘실패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최근 들어 활기를 띠는 대안적 모색들은 바로 실패에 대한 성찰에서 기초를 둔 것으로 기독교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예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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