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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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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vs 신학

1970~80년대 순복음교회 필두의 번영신학 비판으로

신학대학이 교회와 갈등에 놓이다
등록 2011-03-16 18:37 수정 2020-05-03 04:26

1970~80년대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한국 개신교가 이룩한 가파른 양적 성장의 요인을, 이전 연재 글들에서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설명했다. ① 도시 빈민으로 편입된 이농민의 대대적인 신자화 ②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집회를 비롯한 대규모 선교대회를 매개로 한 시민계층의 광범위한 개종 ③ 모던 체험의 문화공간으로 몰려든 전후 청(소)년 계층의 교회 유입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대형화된 교회를 ‘교회의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한국 교회가 처음 신학적으로 서사를 갖추기 시작한 때가 1970~80년대였다. 한국 신학교가 체계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한 때도 바로 이 시기다. 한데 신학교와 신학자는 교회의 신학에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비판적이었다. 즉, 교회의 신학과 신학대학의 신학은 다분히 대립적이었다. 이는 이 시기 한국 개신교를 이해하는 한 키워드다. 이 시각에서 한국에서 벌어진 ‘신학 대 신학’ 혹은 ‘교회 대 신학’의 긴장과 갈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기쁘다 은사 오셨네

교단들의 교회 재적교인 통계를 합친 수를 보면 1960년 60만 명을 조금 상회했는데, 1990년에는 1천만 명이 넘는다(재적교인 통계는 중복교인이 포함됐기 때문에 실제보다 과장돼 있다). 교인의 양적 폭발 과정에서 대형 교회가 등장했다. 한국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은 대형 교회로 부상한 몇몇 교회가 추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5011개이던 한국 교회 수는 1990년 3만5869개로 약 615% 늘었지만, 이 가운데 미자립 교회가 70~80%에 이른다. 이는 대형 교회의 등장과 약진의 추이와 비교하면 한국 개신교의 성장이 얼마나 대형 교회 현상에 치우쳐 있는지를 보여준다.

교회와 신학의 갈등은 교계와 신학대 학생의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987년 총신대 학생들이 서울 대치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관을 점거한 채 총회장의 국가 조찬기도회 참석 사과 등을 요구하고 있다.연합

교회와 신학의 갈등은 교계와 신학대 학생의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987년 총신대 학생들이 서울 대치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관을 점거한 채 총회장의 국가 조찬기도회 참석 사과 등을 요구하고 있다.연합

이 중에서 순복음교회의 성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1958년 천막교회로 설립할 때 교인이 5명이던 교회가 1993년에는 60만 명으로, 35년 동안 무려 12만 배 성장했다. 순복음교회 신화는- 대략 1980년대부터 이단 시비가 본격화되지만- 교단을 불문하고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에 의해 회자되고, 명시적이든 비명시적이든 선망과 모방의 대상이 된다. 이른바 ‘순복음 현상’이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시기를 풍미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병치료, 방언 등 이른바 ‘신유(은사) 체험’이 많은 교회를 들썩이게 했다는 점이다. 은사 능력을 가진 부흥사가 수많은 교회를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이끌었고, 교회는 부흥회를 정례화했다. 또 평신도 은사자들도 교회를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이끌었는데, 이들은 종종 목회자와 갈등을 일으켰다. 교회를 옮겨다니며 목회자의 은사 능력을 비교하는 교인이 적지 않았고(교인들의 이런 순회는 재적교인 수와 실교인 수의 오차를 낳는 주된 요인이다), 많은 목회자와 교인이 은사자가 있는 기도원을 찾아다녔다. 노천기도원은 은사 체험을 갈구하는 이들의 열광적 기도로 넘쳐났고, 부흥사가 되려는 이들이 훈련하는 장이기도 했다.

순복음 현상은 은사 중심적 신앙을 만연시킨 것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의 일상적 생각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다. 은사 체험은 ‘일상에 끼어 들어온 비일상’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삶과 기억을 뒤흔들어놓음으로써 새로운 태도로 현재를 맞이하며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한데 은사 체험은 모든 이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 현상학적으로 소득수준이 낮고 학력이 낮은 이들, 그리고 남성보다는 여성, 노년에게 잘 나타난다. 간접 체험까지 포함해도 신유 체험자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순복음 현상의 다른 측면은 ‘일상에 끼어든 일상’에 관한 것이다. ‘성공지상주의’가 대표적 사례다. 건강과 재산의 축복이 영적 축복과 얽혀 있다는 ‘삼박자 구원론’은 도시 빈민으로 편입된 이농민에게 현실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는 삶의 적극적인 의지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성공의 가치를 위해 모든 효과적인 수단과 방법을 도구화할 수 있는 삶의 태도다.

삼박자 구원론을 구원한 번영신학

그런 점에서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비록 나락으로 추락한 이들의 구체적인 고통에서 유래한 신앙 담론에서 시작된 것임에도,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신앙화한 것으로 확대해석될 여지가 있다. 더욱이 전후 반공주의적 증오 체제가 발전동원 체제로 이행하는 시기의 지배적인 제도화 논리가 성공지상주의였으니, 이런 신앙은 일종의 시대정신처럼 거의 모든 개신교도의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것이 1970년대 중·후반 하나의 신학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국의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 한국의 대형 교회적 신앙과 결합돼 나타난 결과다.

미국의 번영신학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일어난 새로운 대부흥운동 과정에서 등장한 성공지상주의적 신학이다. 법학자이자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실행위원인 딘 켈리가 포착한 대로, 이 시기 미국의 주요 교단은 성장이 멈추거나 감소한 반면, 새로운 복음주의 교단과 교회가 급격히 성장했다. 이런 성장에 대한 신학적 서사로 등장한 것이 번영신학인데, ‘적극적 사고’를 신학의 키워드로 제시한 노먼 빈센트 펄이 그 선구자이며, 그의 문제틀을 목회에 적용해 큰 성공을 이룬 크리스털교회 목사인 로버트 슐러, 을 저술한 새들백교회 목사 릭 워런, 저자인 레이크우드교회 목사 조엘 오스틴 등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 교회 목사들이 번영신학을 이끌었다.

요컨대 번영신학은 1970년 이후 급부상한 미국판 대형 교회(‘메가 처치’라는 용어는 이런 특성의 대형 교회를 함의하는 개념이다)의 서사로 등장한 신학으로, 그 용어대로 신학의 키워드를 ‘번영’에 두고 있다. 번영을 신앙적 현실관의 최상위에 두고 그것을 위해 내면을 적극적으로 구성해가는 자기개발적 삶의 태도를 강조한다. 이는 공동체성을 강조한,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부상한 복음주의와는 다른 양상의 신학이 등장했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번영신학이 담고 있는 신앙 양식을 ‘신복음주의’라고 부르는데, 신자유주의적 성공 담론의 원조 격 되는 담론 양상이 미국판 대형 교회 신학에서 유래했다.

조용기 목사(왼쪽)의 ‘삼박자 구원론’은 로버트 슐러(오른쪽) 목사의 번영신학을 받아들이며 ‘현대화’됐다.순복음 가족신문

조용기 목사(왼쪽)의 ‘삼박자 구원론’은 로버트 슐러(오른쪽) 목사의 번영신학을 받아들이며 ‘현대화’됐다.순복음 가족신문

조용기 목사는 1970년대 후반부터 로버트 슐러와의 관계를 본격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번영신학의 내용을 빌려 순복음교회의 신학을 발전시킨 듯하다. 이후 한국의 대형 교회 목사들이 앞다퉈 번영신학을 수입해 빠른 속도로 한국 개신교가 지향하는 교회 신학으로 자리잡아갔다. 다양한 목회 현장을 통해 교인들은 번영신학식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기개발을 신앙적 가치관이자 윤리로 수용했다. 최근 번영신학 중심 인물들의 책은 불티나게 소비되고 있고, 교회의 갱신 프로그램의 신학적 골격을 이루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더 자세히 다루겠다).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에는 다분히 신유 능력에 의존하는 은사주의적 기복주의 신앙 기조가 강하게 깔려 있는데, 이것은 중산층 남성, 그리고 학력이 높고 더 합리적인 청년층의 기호와 잘 맞지 않는다. 즉 담론의 이미지가 신학의 보편성을 담아내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의 번영신학을 차용함으로써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론은 모던 담론으로 이미지 갱신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순복음교회에 대한 불편함이 남아 있는 이들에게도 그 신학이 영향력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용기-로버트 슐러’의 조합이 만들어낸 적극적 사고의 신앙·신학 담론은 1970년대 대형 교회의 신학으로 많은 개신교도와 목사의 생각에 파고들어갔다.

새로운 신학의 ‘값싼 은혜’ 비판

개신교 세력이 급성장하던 시기에 각 교단은 넘쳐나는 목회자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 투자를 활발히 했다. 여기에 교단 분열 효과는 신학 교육 열기의 또 다른 동기가 된다. 교단 간 경쟁은 교회 수뿐만 아니라 교단의 신학적 색깔을 생산하는 경쟁에 열을 올리게 했던 것이다. 급성장기의 교회들은 신학 교육 내용에 관여할 여유가 없었고, 신학교에 대한 투자는 이전 시기보다 활발했다. 그리고 해외 유학을 통해 현대적 신학을 공부하고 온 학자들이 속속 신학대학으로 유입됐다. 신학대학이 양과 질적으로 급성장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던,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대규모 분열(통합 쪽과 합동 쪽)을 야기한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 또한 한국개신교 신학의 질을 급부상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쪽을 비롯해 한국기독교장로회나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등 WCC 가맹 교단의 신학자들은 현대적 신학운동과 교류할 장을 얻었다. 특히 당시 유럽 교회들이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 아시아 종교들과의 대화 같은 뜨거운 주제를 다루는 신학 전문가가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 운동이 일어나면서 유대교와의 교류가 본격화됐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가톨릭교회가 현대적 신학과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서 WCC를 매개로 하는 신학적 대화의 장은 한층 폭넓어졌다.

그런데 신학 교육이 활성화되자 교회와 신학 간의 대립이 본격화됐다. 신학대학마다 ‘신학은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강령 같은 말이 수없이 회자됐지만, 유럽 선진국의 신학이 진정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생각이 신학자들을 지배했다. 반면 교회에서는 신학대학이 배출한 학생이 교회 현장에 유용하지 않고, 신학자들의 언어 또한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신학과 교회가 협력적이 될 때가 있는데, 주로 타 교단의 신학이나 신앙을 비판할 때였다. 한국의 주요 교단들은 순복음교회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했다. 1980년쯤부터다. 목사들은 이단 시비를 시작했고, 신학자들은 번영신학을 비판했다. 번영신학은 고난을 삭제하고 축복만 강조한다는 비판이 주된 논조였다. 1943년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치의 성장주의를 지지한 독일 교회를 겨냥해서 한 말인 ‘값싼 은혜’가 번영신학을 겨냥한 말로 재활용됐다.

롤모델 비판으로 고립된 신학대학

그런데 번영신학은 순복음교회만의 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대형 교회의 자기 서사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하여 이런 신학자들의 비판은 대형 교회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며, 대형 교회를 선망과 모방의 대상으로 여기던 중·소형 교회들의 신학 비판이기도 하며, 목회 과정에서 목회자의 신학적 담론에 동화된 신자 대중의 신앙(적 욕망)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 이유로 신학과 교회 간에는 높은 벽이 생겼고, 신학대학은 한국 교회로부터 영향력을 제약당한 고립된 공간이 되었다.

이 시기 신학이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영역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변두리였고, 교회적 신학이 아니라 비판적 신학이었으며, 보수가 아니라 진보였다. 이는 훗날 1990년대 후반 이후 교회와 신학 간의 전쟁에서 교회가 신학을 정복해 무력화하는 사태의 출발점이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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