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를 전후로 하는 전대미문의 개신교 대부흥기에 대중이 교회로 유입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순복음 현상’을 상징으로 하는 기도원식 부흥운동(나는 이것을 지난 글에서 ‘기도원의 교회화’라고 불렀다)이 그 하나고, 빌리 그레이엄을 상징으로 하는 아메리칸 스타일 부흥운동이 다른 하나다. 전자가 도시로 몰려온 이농자들의 교회 유입과 더 연관이 있다면, 후자는 도시 시민계층의 유입 현상과 관련 있다. 그런데 후자에 관해 또 다른 측면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후 시민계층 청(소)년 세대의 ‘낭만적 모던 체험’에 관한 것이다. 교회는 이들의 모던 체험의 주요 장소였다.
찬송가의 분열, 복음성가의 확산
이른바 ‘포크송’ 문화가 전후세대 청년의 모더니티 체험의 지배적 양식으로 맹렬하게 확산되던 1970년 무렵, 찬송가를 부르는 청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교회가 사용하던 찬송가는 교단 분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1949년 가까스로 여러 교단이 연합해 를 만들어냈으나, 1959년 한국 최대 교단이자 반공주의 그리스도교의 온상이던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 대한 태도를 이유로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실 이 분열은 이념 문제에 지역색의 문제가 덧붙여진 것으로, 평안도와 관련 있는 서북계 중심의 주류 그룹으로부터 황해도와 더 밀접한 다른 서북계 중심의 집단이 WCC를 좌경세력으로 낙인찍으며 이탈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으로, 후자를 ‘합동측’으로 분류하는데, 이 분열은 이제까지의 다른 교회 분열과는 달리 규모가 초대형이었다. 나아가 이것은 장로교 내의 분열을 넘어서 한국 개신교를 양 진영으로 이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의 한 양상이 서로 다른 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한 것인데, 합동파가 중심이 되고 장로교의 다른 파인 고려파를 포함한 대다수 군소 교단이 사용하는 가 1962년에 만들어졌고, 이에 대응해 WCC 지지 교단인 통합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등 당시 비교적 규모가 큰 교단이 연합해 를 만들었다(1967년).
다른 찬송가를 사용한다는 것은 성서 해석을 달리하는 것보다도 대중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훨씬 크다. 그런 점에서 교단 분열에 대한 그리스도교 청년층의 반감은 작지 않았다. 마침 그 무렵 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복음송(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번안노래로 맹렬히 확산되고 있던 미국의 포크송에 대한 문화적 호감과 겹쳐지면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CCM을 당시 한국에서는 ‘복음성가’라고 불렀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는 ‘복음성가’를 ‘찬송가’보다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해 예배 때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하지만 실은 나 에 수록된 노래들 대부분도 서양 그리스도교 전통의 찬송가가 아니라, 19~20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부흥집회 때 사용된 노래, 곧 그 시대의 부흥성가였다. ‘찬송가’와 ‘부흥성가’라는 분류도 명료하지 않지만, 더욱 큰 문제는 찬송집에 수록된 영미식 부흥성가들이 한국에서는 보편적 의미의 찬송 정전(Canon)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에 있다. 신앙을 역사의 시간 밖 신적 시간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펴면서도, 그 논리 근저의 신적 시간에 대한 의미 코드는 서양의 특정 시간의 특정 관점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시대적 한계로 인한 인종적·성적·계급적 편견이 도처에 숨겨져 있다. 이러한 신앙의 식민주의, 혹은 서구 중심주의는 속에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찬송가가 전체 678곡 중 단 2곡, 에는 전체 600곡 중 27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나마 한국인이 만든 노래들 대부분도 한국적 현장성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교회에 형성된 청(소)년 자율공간
여기에 더해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예배 때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로 여겼고, 그 연주법도 화려한 리듬 사용 등을 제외한 기본
적인 코드와 멜로디만을 사용하도록 했다. 더욱이 찬송가를 부르는 창법도 다분히 타령조나 일본 가요풍이었다. 그러나 청년세대는 ‘찬송가’보다 ‘복음성가’를 더 좋아했고, 피아노나 오르간보다 통기타를 선호했다. 그들은 이 노래들을, 감정이 깊게 배어 있는 타령조나 일본식 가요의 창법보다는 감정을 절제한 포크송풍으로 불렀다. 그리고 복음성가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을 최대로 활성화했다.
지난 글에서 말한, 대학가를 휘몰아친 미국식 부흥집회가 그 예였고, 무엇보다 교회의 청(소)년회, 수양회, 문학의 밤 등이 크게 활기를 띠었다. 이른바 청(소)년의 공간이 크게 활성화된 것이다.
이 공간에서 청(소)년들은 이전 세대가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문화를 실현했다. 기타 반주로 복음성가를 ‘싱얼롱’하며 율동과 다양한 놀이가 덧붙여졌다. 특히 수양회 때 남녀가 한데 어울려 추는 포크댄스는 청년 놀이문화의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크리스마스 때 밤새 놀기(‘올나이트’)와 새벽에 찬송을 부르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새벽송’은 평소에는 할 수 없던, 통행금지의 금기를 깨는 경계 넘기의 쾌감을 주었다.
또 ‘문학의 밤’ 행사는 시 낭송, 노래, 연극, 콩트 등으로 구성된 청(소)년의 종합문화행사였다. 이것은 타율적이고 폭력이 난무한 학교나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인 입에 발린 말로 가득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서 어느 정도 자율적인 공간이었다. 하여 이 비제도영역의 독서 체험, 연기 체험, 노래 체험, 문집 만들기 체험 등은 청(소)년 세대의 인지적 주체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것은 국가나 교회가 의도하지 않은, 주체가 형성될 가능성의 공간으로 교회의 청(소)년 공간이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그리스도교가 대중, 특히 청(소)년 전후세대에게 매력적인 문화공간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교회에서 벌어진 청(소)년 전후세대의 모던 체험은 압도적으로 1960~70년대 미국 모던 문화에 정향돼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다가가고 그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기보다는 1960~70년대 미국 청(소)년 문화의 일면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부정적인 면을 강조해서 평가하면, 선망하는 것을 제한된 공간에서 실험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잠시 그 선망의 주인공이라고 스스로를 오인하는 이른바 ‘신데렐라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 식민지 세대의 기독교도들도 동세대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더 모던적’이었다. 그들의 모던 체험의 중요한 해석적 기반은 미국적 근본주의 신앙이었다. 물론 이들도 일상은 일본에 의해 추진된 근대화의 깊은 영향망 안에 있었다. 다만 그러한 경험을 해석하는 주요한 틀의 하나가 미국적 근본주의였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의 전후세대는 TV와 더불어 확산된 대중문화, 특히 소비사회의 개인화와 세속화의 풍조 속에서 발전된 청(소)년의 다른 감수성으로 기성세대와 격렬한 문화투쟁을 벌이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을 정착시켜갔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아직 개인주의가 발전할 사회적 토대가 빈약했음에도, 그러한 문화상품의 열렬한 소비자에게 개인주의에 대한 낭만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지향하는 것(개인주의)과 몸에 밴 것(집단주의)이 이질적으로 교합된 육체, 그것이 1970~80년대 청(소)년의 공통된 존재 상황이었다. 그것은 심각한 존재 불안을 의미했다.
존재 불안은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한다. 존재는 안정된 자기의식을 갈구하고 반응하는데,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몸의 반응은 종종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동력이 된다. 감정이론들이 주장하는, 생각이 행동화하는 조건이 이 시기 청(소)년의 존재 상황에서 유추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언어화의 노력이 왕성하게 일어난다. 그것을 위해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게걸스럽게 모방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1970년대 청(소)년이 문화적 모방에 더 열을 올렸다면, 1980년대는 지적·이념적 모방에 더 적극적이었다.
교회의 청(소)년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 매우 집단주의적인 사회 기조(외면성)에 순순히 동조하지 않는 ‘내면성’이 빠르게 발전했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신앙운동을 발견하려는 운동이 급속하게 확산된다. 이러한 운동의 양상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는데, 나는 이것을 ‘영토의 내부화’와 ‘병행화’, 그리고 ‘탈영토화’로 명명하고자 한다.
‘영토의 내부화’란 청(소)년의 다른 감수성을 교회 안에서 연착륙시키는 형식으로 새로운 문화적 감성을 교회의 하위 영역이 아니라 중심적인 신앙 제도로 영토화하려는 운동이다. 이것은 새로운 감수성을 반영하는 교회 개혁의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오늘날 대형교회로 성장한 몇몇 교회나 비판적인 복음주의 교회운동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 ‘영토의 병행화’란 교회와 그 외부에 대안적 신앙 공간을 병행시키는 방식으로, 선교와 성경 공부 중심의 파라처치(UBF, 네비게이토, IVF, CCC 등 각종 선교단체들)가 병행모델의 주요 장치로 제도화되었다. 마지막으로 ‘탈영토화’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급진적 해체주의와 새로운 재구성을 지향하는 급진주의 모델로, 민중신학운동이나 민중교회운동, 혹은 새로운 실험적 교회운동 등의 시도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 세 모델로 최근의 개신교 현상을 살피는 것은 이 연재의 뒷부분에서 더 이야기할 것이다.)
하여 1970~80년대 교회는, 동시대 한국 사회 곳곳이 그랬던 것처럼, 문화투쟁이 제법 격렬하게 전개된 또 하나의 장소였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복음성가를 찬송가보다 낮게 평가하거나 청(소)년층의 문화적 아이콘의 하나였던 기타를 예배의 외부로 배치하는 수구적 태도 외에, 파라처치들과 그 스타일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보인 것은 청년층의 신앙적 열정을 파라처치에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최근 해외선교가 교회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수많은 단기선교팀은 파라처치에서 훈련받은 선교사의 안내와 코디네이팅 없이는 현지에서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찍이 해외선교에 나선 파라처치들은 공격적인 선교를 해왔다. 이는 ‘공격적 선교’에 대한 교회의 주의 깊은 성찰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현지에 대한 더 많은 경험과 인력이 축적돼야 함을 뜻했다. 그 상징적인 예가 2007년 아프간에서 피랍돼 2명이 살해되고 43일 만에 석방된 분당샘물교회 사태였다. 공격적 선교를 지양하기로 표방한 대표적 교회였지만, 현지에서 그 교회 단기선교팀은 그 점에서 다른 선교팀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이제는 보수적 공간이 된 교회전후세대의 모던 체험에 대한 비판적 반성은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 이후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1970년대의 미국적 모던의 모방에서 시작된, 앞서 세 가지로 요약한 변화의 시도에 매우 수구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개신교 교회는 한국 사회의 자기 쇄신 과정에서 매우 지체된 대표적 공간이 되었다. 그것은 특히 젊은 층의 호감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된다. 하여 1980년대 후반에 오면 청(소)년층의 교회로부터의 철수가 본격화된다. 2000년대에 이르면 전 연령대에서 교인 감소가 뚜렷하게 진행되고, 사회적 신망도는 급격히 추락한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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