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개신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이 시기 교회 성장의 핵심에는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가 있었다. 한데 본격적인 성장을 한 것은 1960~90년대 초까지의 기간이었다. 지난 연재글에서 보았듯, 이 시기의 성장은 반공주의를 성장·발전의 동력으로 전환시킨 ‘생산적 증오’의 신앙과 관련 있다.
이때 성장은 두 축으로 나뉜다. 1960년대 이전에 전투적 반공주의를 행동화한 월남자 교회가 하나의 축이라면, 이 시기에 새로 설립한 교회가 다른 축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교회가 영락교회이고, 후자는 순복음교회가 대표적이다. 이 글에서는 두 교회를 상징적 축으로 하는 교회의 대부흥이 당시 한국 사회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그 성장의 사회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태초의 ‘월남자 대형교회’ 영락교회
정정일 목사가 각 교단의 자료를 종합한 통계에 바탕하면, 개신교 신자는 1960년에서 1970년까지 10년간 약 500% 증가해 300만 명을 넘어섰고, 1977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으며, 1990년에는 1200만 명에 달했다. 물론 이 수치는 과장돼 있다. 1995년 인구센서스에서 자신이 개신교 신자임을 밝힌 사람의 수가 876만여 명이었다. 아마도 재적 통계 속에는 신도 수 부풀리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1960~90년 한국에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교세 성장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93년 2월 미국의 는 규모로 보는 세계 50대 교회를 발표했는데, 1위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오른 것을 비롯해 10위 안에 5개, 50위 안에 23개의 한국 교회가 포함되었다. 영락교회는 이런 대부흥의 초기 국면을 주도한 교회로, 1965년에 이미 재적 교인 1만 명을 넘어서는 세계적 규모의 초대형교회 반열에 올랐다. 1945년 27명으로 시작한 이 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국가와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월남자 기독교도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이북신도대표회’의 중심에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가 있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에 가장 크게 기여한 미국 북장로회와의 연결망에서 한 목사가 차지하는 특권적 위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북장로회의 든든한 후원을 받는 그는 미국 정계의 보수·반공주의적 인사들과 특별한 연결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영락교회는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전후해 남한의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유력 인사들(장도영·오제도·선우종원 등)에서 극우 테러리스트까지 폭넓은 보수 우익의 기지였다.
해서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의 극우 편향적 제도화가 폭력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에, 아직 소수 종파인 그리스도교는 특권과 특혜를 누렸고, 영락교회는 그 중심에 있었다. 1961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개발주의 정책이 본격화하던 시기에도 이런 기조는 계속되었다. 이미 한경직 목사는 1961년 6월 군사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위해 개신교 지도자들의 국제친선사절단을 이끌었고, 1966년 시작된 국회 조찬기도회의 중심 인물이었다.
이미 앞의 연재글에서 보았듯 개신교회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로 초강경 반공주의 체제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며 체제의 자양분 역할을 했고, 또 최대 수혜자였다. 당시 ‘교회의 세속적 성공’을 이끈 교회는 영락교회였다. 비기독교 국가에서 최초로 도입된 사례인 군종제도는 그 특혜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제도는 압도적으로 개신교회를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개신교는 엘리트 군인과 사병 모두에서 최대 신자를 보유한 종파가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처음부터 이 제도의 도입과 운영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 성장의 유형은 한국 근대국가 형성기의 전투적 반공주의 기조 속에서 국가와 교회가 긴밀하게 연동하면서 성장을 이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나는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런 교회 대형화의 양상을 ‘월남자형 교회’로 부르고자 한다).
‘잘 살아보세’ 대형교회의 등장한편 순복음교회는 지난 연재글에서 보았듯 군사정부가 추진한 개발주의와 좀더 긴밀히 연관된다. 한국이 초고속 성장을 하던 시기인 1970년대에 평균 경제성장률이 9.2%였는데, 순복음교회는 1963년 재적 교인 3천 명을 넘어섰고, 1972년부터 1981년까지 평균 9.3% 성장했다. 서울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교회당을 옮긴 1973년 1만8천 명을 돌파했고, 1993년 가 발표한 세계 최대 교회 50개 리스트에서 교인 60만 명으로 단연 1위를 차지했다. 이 수치는 2위인 안양남부순복음교회의 6배에 달하며, 2~10위를 합한 수의 두 배 가까운 규모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70년대 10년 동안 이 교회의 교인 수 성장률이 1600%를 넘는다는 점이다.
홍영기 교회성장연구소 소장은 영락교회의 성장에는 정치적 요인이 중요하지만, 순복음교회는 사회·경제적 요인과 더 밀접히 관련된다는 논점을 제시했다. 즉, 1960년대 국가가 주도한 개발정책으로 도시로 대량 유입된 이농민을 주요 선교 대상으로 하는 목회 모델의 성공 사례로 해석하는 것이다.
1960년대에 도시로 올라온 이농민들은 서울 중랑구, 관악구, 성북구, 성동구, 광진구, 서대문구, 영등포구 등 한강 지류나 야산 지역에 무허가 주택단지를 형성해 집단 거주했다. 기초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어지지 않은 주거지와 혹독한 노동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에게 국가는 거의 아무런 기회도 제공하지 않았다. 바로 이들에게 교회가 다가간 것이다.
매번 예배는 부흥회와 같았다. 우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 고함치는 사람이 있었고,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펄쩍펄쩍 뛰는 이들이 넘쳤다. 어떤 사람은 질병이 치료되었다고 춤을 추었고 어떤 사람은 경련을 일으키며 나뒹굴었다. 그 광경에 대다수 교인은 신의 은사를 확인했다.
조용기 목사는 이들에게 ‘축복’의 말을 전한다. 병 고침만이 아니라, 부자가 될 거라고. 그리고 영의 축복까지도. 이른바 ‘3박자 구원’의 메시지다. 전후 부흥사들의 병 고침의 메시지에, 1960년대식 ‘잘 살아보세’의 구호가 신탁처럼 바뀌어 추가되었다. 이농민들에게 그것은 복음, 희망의 메시지이자 구원의 소리였다.
조용기 목사는 월남 기독교도가 아니었고, 순복음교회도 월남자형 교회가 아니었다. 이 교회는 ‘오직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군부독재 시절의 담론과 제도에 호응하는 신앙 담론과 제도를 통해 대부흥을 이룩했다. 그리고 교회로 몰려온 사람 중 상당수는 개발독재시대의 대중, 시대의 저주에 존재가 거덜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축복을 선사했고, 그들은 교회에 충성을 다했다. 이렇게 반공주의에 대한 증오의 기조를 성장 동력으로 전환시켜 자신의 발전과 교회의 발전을 동시에 실현하려는 ‘생산적 증오’ 담론을 실현시킨 교회 모델, 순복음교회를 필두로 하는 이런 교회의 양상을 나는 ‘선발대형교회’라고 부른 바 있다.
목회학 연구자인 박종현 박사는 이 시기 교회 성장의 또 다른 특징을 제기한다. 장로교에서도 징후가 뚜렷해지지만, 교단 지역조직에서 개별 교회에 목회자를 파송하는 제도(교역자 파송)가 엄격하게 지켜졌던 감리교와 성결교에서조차 이 시기에 대형화된 교회들을 중심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장기간 목회가 시작되었고 은퇴 이후에도 해당 교회를 지키는 은퇴목사제도가 정착했다. 이것은 1970년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특징이다. 이런 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이른바 ‘한국형 메가처치(mega-church)’가 자리를 잡았다. 박종현 박사는 이것을 3선 개헌과 유신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모색과 연계시킨다. 이런 현상이 이 시대의 정신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발대형교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1970년대에 탄생한 한국형 대형교회의 특징이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
‘전도부인’들의 열정을 흡수한 순복음교회독재자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강력한 교회지도자가 가장 빛나는 것은 공동체의 틀이 잘 짜여 있어 안정된 성장을 구가하던 월남자형 교회보다는, 부흥회 같은 분위기로 좌절한 사람들의 영혼을 격렬하게 주체화하면서도 그들을 적절히 관리해 공동체의 동력으로 전환시킨 순복음교회 같은 선발대형교회에서였다.
순복음교회 등은 강력한 리더십과 여신도들의 열정을 융화하며 성장했다. 당시에 은사를 베풀며 복음을 전하는 열혈 여성 신자들, 이른바 ‘전도부인’들은 수많은 교회에서 갈등과 분열의 미시적 원인이 되었다. 이 여성 은사자들은 종종 목회자의 가르침에 반하는 환상 체험을 교회에서 설파함으로써 교회의 상징적 질서를 대표하는 목사나 장로의 권위를 격하하는 강력한 질서 교란자였다. 여성 신학자 이숙진에 따르면, 방언은 지배 언어에서 소외된 여성이 주체화되는 주요 조건이었다. 게다가 남성 주류 사회의 협상과 공생의 기술에서 소외돼 있던 그녀들의 주체화는 기성 교회의 질서를 교란하는 문화적 혁명의 요소였다. 1970년대 전후에 전도부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사람들의 일상에 파고드는 동력인 동시에 교회의 내적 분쟁과 분열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대형화에 성공한 교회들은 열광적인 전도부인들을 체제내화하는 데 성공한 교회이기도 했다. 박종현을 포함한 여러 목회학자는 순복음교회의 고도성장 배후에 ‘구역장제도’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시에 많은 중소형 교회는 전도부인들이 은사를 무기로 목사와 장로의 권위를 격하해 분열과 해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복음교회는 그녀들의 불타는 열정을 교회 성장의 자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이 야생적 은사를 순치시키는 장치가 구역장제도였다. 이렇게 독재시대에 한국 그리스도교는 급성장했고, 많은 한국형 대형교회를 탄생시켰다.
질병 치료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김계화라는 여성이 만든 할렐루야기도원은 1970~80년대에 매우 유명했다. 시인 정대구는 ‘할렐루야기도원에서’라는 제목의 연작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러나 주저앉듯 수용되어 있는/ 의지가지 없이 늙고 병든 자/ 그 무리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 헤맸네/ 혹 여기에 계시지 않을까.”
이 시기 기도원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한 이요한 박사는 기도원을 자주 찾는 이들이 월 35만원 이하의 저소득층, 고졸 이하의 저학력층에서 많이 나타나며, 좌절된 현실에 대한 절망감에서 기도원을 찾게 되었다는 연구성과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원이 필요했다기도원은 그런 곳이었다. 한데 조용기 같은 부흥사들이 교회를 기도원화했다. 거기에 그들은 성공에 대한 진취적 열망을 새로운 신앙의 코드로 첨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실패한 이들은 많았고, 기도원화한 교회의 희망의 메시지로는 더 이상 포용할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그런 이들에게 기도원은 여전히 필요했다. 교회는 절망의 나락에서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비틀어지고 공동체의 통합에 부정적 역할을 하는 이들, 그들을 수용할 다른 신앙 공간을 여전히 관리하고 있었다. 기도원이 그런 장소였다.
정리하면, 한국의 모던 공간으로 교회는 이렇게 그 시대의 모던을 실현하면서 대형화했다. 즉, 교회는 한국적 모던을 체현하며 성공을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모던 한국의 ‘아픔’을 흡수했다. 나운몽의 기도원이 그랬고, 박태선의 부흥회가 그랬다. 선발대형교회의 부흥회 같은 예배가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그 성공은 한국적 모던의 질서에 순치된 신앙만을 제도화했다. 신앙은 아픔을 흡수했으나, 아픔의 제도를 문제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제도를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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