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조희연에 따르면, 남한 사회는 건국 초기부터 빠른 속도로 ‘반공규율사회’로 조직돼갔다. 이것은 일종의 ‘심성의 정치학’(politics of mentalite)으로, 반공주의라는 증오의 정치가 어떻게 남한 사회를 강력한 결속력을 가진 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었는지를 말한다. 또한 ‘심성의 경제학’(economics of mentalite)적 해석도 더해, 발전동원체제라는 병영적 성장사회를 가능하게 한 심성(집단인식)의 토양이 됐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한편 그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반공규율사회론은 ‘심성의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 of mentalite)으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식민지와 전쟁의 체험으로 생긴 정신적 외상을 다른 심리적 요소로 전환하는 심성 작용과 그 효과에 관한 해석이다.
세 번째 해석, 즉 심성의 사회심리학적 물음은 그리스도교 반공주의를 해석하는 중요한 틀이 된다. 이 글은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가 왜 그토록 완고한 반공주의에 사로잡히게 됐는지, 그러한 집단인식이 사회와 접속하면서 어떻게 번안됐는지를 살펴보는 데 초점이 있다. 하여 근대 한국 사회와 반공주의적 개신교의 관계를 묻고자 한다.
신사참배, 씻기 어려운 상처
개신교 지도자 사이에서 ‘반공’이라는 문제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30년을 전후한 때부터다. 일제하에서 항일운동의 축이 사회주의 그룹으로 옮겨가고 미국계 선교사들이 장악한 교회는 빠르게 체제내화됐다. 이에 개신교 교회 내부에서는 교권의 권력 독점에 대한 문제 제기가 빗발쳤고 이념적 갈등이 첨예화됐다. 나아가 교회를 떠나는 이도 속출했다.
이렇게 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악마화하는 담론을 유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3대 교단의 하나인 성결교의 지도자 이명직은 1938년 성서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이 소련 공산주의라고 하면서 일본·이탈리아·독일의 반공연맹을 지지한다는 글을 썼다. 이는 개신교 각 교단과 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1932)에 담긴 반공의 교리화와 맥을 같이한다. 이 점에서 가톨릭도 예외가 아니다. 교황 비오 11세가 만든 (1937)이 가톨릭계의 각종 매체를 통해 보급돼, 공산주의자들과는 어떤 것도 함께할 수 없으며, 우리 시대에 격퇴해야 할 악마적 존재임이 천명됐다.
이 무렵 식민지 당국도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 공세와 탄압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는 교회의 반공 담론이 신자 대중과 시민사회에 침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과장할 수는 없어도 교회는 빠르게 반공주의의 아성이 돼갔다.
한데 1930년대 말 사회가 전시동원체제로 전환되자 개신교 교회들은 반공주의보다 더 심각한 현안에 직면하게 된다. 강화된 동원체제의 일부였던 신사참배가 그것이다. 교회는 신사참배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를 계기로 외국계 선교사들이 추방됐으며, 박형룡·남궁억 등 주요 한국인 지도자들이 망명을 떠났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지도자 70여 명이 구속됐고, 당시 사립학교의 70%를 점한 신학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계 학교들이 폐쇄되거나 관공립학교로 흡수됐다.
하지만 교회의 대부분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신사참배에 동조했다.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사회학자 강인철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그리스도교도들은 대체로 신사참배에 마지못해 참여하는 ‘소극적 지지자’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우상숭배로 해석될 수 있는 신사참배 행위는 씻기 어려운 상처였다. 이들의 각종 후일담에 따르면 신사참배의 수치심은 그리스도교의 식민지 체험 가운데 가장 뼈아픈 고통이었다.
악마화의 내·외부적 조건당시 장로교 신자들은 조선의 그리스도교 신자 가운데 가장 근본주의적이었다. 개신교 신자 가운데 40%를 넘는 서북지역 장로교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신사참배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한 이들 역시 서북지역 장로교도였다. 그럼에도 그들 대부분은 신사에 참배해야 했다. 근본주의적 신앙으로선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수용했다. 말할 수 없는 굴욕감과 수치심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이런 수치심이 증오로 전환되면서 조선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활력을 되찾는다. 공산주의가 악마의 표상으로 해석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10년 이상 반공이 신앙의 기조 속으로 스며들어온데다, 공산주의와 적대하면서 근대적 신앙과 신학을 구축해온 서구의 전통도 공산주의를 악마화하기에 훌륭한 기반이 돼주었다.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자신들의 행위는 얼치기 악마의 그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것으로 괴로워하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악마는 이미 이웃으로 우리의 일부가 됐고, 많은 신자를 빼앗아갔으며, 시시각각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이러한 반공 신앙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경험과 얽히며 불꽃을 피웠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잘 보이지 않던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신자들, 심지어 지도자 가운데 많은 이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1946년 미군정청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선호는 80%에 달했다. 이는 북한 지역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도들은 자신이 악마에 포위돼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교회는 적으로 첩첩이 포위된 외로운 섬과 같았다.
당시 북한 지역에서 그리스도교도, 특히 장로교 지도자들은 비교적 탄탄한 사회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방 정국에선 ‘인민의 정치’가 고도로 활성화됐다. 특히 북한 지역의 지배적 정치권력은 인민의 사회·정치적 동원을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식민지 시절 이렇다 할 저항의 경력을 공인받지 못한 교회로서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악마적 대상인 공산주의자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위축돼 있던 근본주의적 개신교 지도자들은 재산의 사회적 공여에 동의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 토지개혁은 실시됐고, 수많은 자산가들은 심한 모욕을 느끼며 재산을 ‘강탈당했다’.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기억했다. 더 이상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 행동이 필요하다. 악마와의 전쟁 말이다.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월남’이었다.
월남자 교회와 증오의 정치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월남했다. 불확실하지만 추정컨대 그 수는 남한 전체 개신교 신자의 3분의 1에서 절반에 육박한다. 하지만 그 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미군정 당국은 물론 미국 종교·정치계에 접근성이 높은 집단이었다는 점이다(‘통역정치’ ‘선교사정치’ 등의 용어는 이들이 개척한 미국과의 접근 경로를 시사한다). 군정 당국은 이들에게 일본인이 두고 간 막대한 종교 재산을 무상으로 공여했고, 이것을 토대로 영락교회 등 ‘월남자 교회’가 속속 세워진다. 월남자 교회는 남한 사회의 반공주의를 추동하는 중심이 됐다. 이 교회들은 남한 정국에서 극우 테러리즘의 행동대원들이 충원되고 조직화되는 주요 공간이었고, 반공주의가 담론화·제도화되는 마당이기도 했다. 기독청년면려회 서북연합회나 대동강동지회, 서북청년단 등 각종 테러 정치의 행동대 역할을 한 단체들이 월남자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난 연재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의 시민사회는 주로 선교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바탕해 아시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국 정치인들은 그러한 시민사회적 인식에 바탕해 국제정치를 수행했다. 한데 한국통으로 알려진 선교사 대부분은 근본주의자였고, 서북계 장로교 지도자들과 친화적인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월남자 교회는 군정청의 후원 외에도 미국의 교회와 시민사회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유치할 수 있었고, 나아가 미국의 정치세력과 비공식 외교 라인을 보유할 수 있었다.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복수심은 더 격한 행동을 필요로 하기에 실행되기가 훨씬 어렵다. 하지만 복수심은 실행되지 않을 때 다른 감정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다.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근본주의적 신앙이 감당하기 어려운 과거의 굴욕과 수치심을 증오심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내적 상처를 봉합하려 했다. 이때 대상의 전환이 이뤄진다. 수치심을 안겨준 대상보다 훨씬 안전한 증오의 대상이 선정된다. 당국도 선교사도 모두 적대시하는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그들을 악마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심성적 기반을 얻었다. 한데 증오는 종종 복수심이라는 공격적 감정으로 바뀐다. 월남자 교회는 그러한 복수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갖추었다. 하여 복수가 실행됐고, 그 과정에서 교회는 더욱 견고하고 공격적인 반공주의 신앙으로 무장하게 됐다.
이어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것은 비단 1950년부터 3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미 1946년 이래 남한 사회는 내전 상황에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제까지 전세계의 어느 국지전에서보다 많은 이들을 단기간에 죽음으로 몰아갔고, 사회적 자원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엄청난 파괴와 살육 뒤에는 이념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념 갈등의 최전선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또 그 이상의 가학성을 발휘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
전후에도 계속된 교회의 전쟁하지만 전쟁으로 동원된 마음까지 휴전 상황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마음은 여전히 그 증오의 정치에 과잉 동원된 상태에 있었다. 심성의 전쟁은 계속되어야 했다. 증오는 남한 사회 구석구석을 휘저으며 공산주의를 색출하는 심성적 자원이 됐다. 나아가 내면에서도 악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교회는 그런 심정의 내전을 충동질하는 주된 사회적 기구였다.
전후, 전쟁의 상처들이 소용돌이쳤다.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온갖 사회적 행동들이 미친 말처럼 울부짖는 시간,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종식된 전쟁을 심성에서 계속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악마가 사라질 때까지 증오와 복수는 계속되어야 한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부정권은 여전히 과잉 동원돼 있는 심성의 정치를 발전동원체제 기반으로 활용했다. 발전동원체제는 바로 군부독재 권력이 해석한 ‘전후’였다. 아직 증오와 복수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내부의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사회가 발전해 저 북쪽의 악마를 압도하고, 나아가 그들이 궤멸될 때까지 비상 동원체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계속되는 마음의 반공주의였다.
이렇게 교회와 군사독재 정권은 유사한 ‘전후’를 추구했다. 그들은 공통된 적인 공산주의라는 악마와 전쟁을 계속하려 했고, 그렇게 사회적 증오와 복수의 심성으로 조직된 신앙과 이념으로 무장했다. 이 두 체제는 심성에서라도 전쟁이 계속되어야만 존속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 반공적 냉전주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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