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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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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된 신, 신이 된 자본

1990년대 이후 자기계발 담론의 개신교판인 ‘긍정의 신학’ 대유행… 성공만을 축복하는 대형 교회는 중·상위 계층의 공간으로 변질
등록 2011-06-09 19:52 수정 2020-05-03 04:26

지난 글에서 보았듯이 민주화와 소비사회화의 빠른 변화 속에서 권리의식과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급격하게 신장한 시민층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의 현상이다. 교회는 그들을 포섭하기에는 너무 권위적이다. 또 지난 글에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전통적 경계가 이완되고 해체되며 새로운 네트워크적 관계가 형성되는 지구화의 변화와도 교회는 엇갈린다. 교회는 너무 배타적이고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하다.
이 글을 포함해서 다음 몇 회에 걸쳐 나는 이러한 이탈과 위기 상황에서 대형 교회가 주도하는 교회의 적응 전략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글에서 다룰 것은 자본과 신에 대한 문제다.

태초에 삼박자 구원론이 있었다

조용기의 순복음교회는, 말했듯이, 도시 빈민층을 대대적으로 흡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전대미문의 성장을 이룩했다. ‘삼박자 구원론’으로 요약되는 조용기의 메시지의 요체는 삶의 질곡에 낙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건강과 풍요, 신앙의 성공을 동시에 획득하라는 축복론에 있다. 그런 그에게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적극적 사고’(Positive Thinking) 신학의 주창자인 노먼 빈센트 필과 로버트 슐러 등과의 만남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양적 성장에서는 압도적인 성공을 이룩했음에도 여전히 비주류적, 심지어는 이단적 존재로 낙인찍힌 그에게 미국 교회의 최신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들과의 만남은 그를 일약 한국 교회의 대표성을 가진 인물로 부상시켰고, 나아가 미국적 번영신학이 단지 미국적 현상만이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임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게 했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명성이 추락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유럽·남아시아·남아메리카 등 개신교 성령운동이 폭발적으로 부흥하는 지역에서 그는 세계 기독교 부흥의 상징적 존재로 추앙되고 있다.
사실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론은 미국 번영신학의 적극적 사고론과 담론의 형식상 유사성을 띤다. 그런데 실은 양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조용기에게서 적극적 사고는 빈곤이 전제돼 있었다. 반면에 미국적인 적극적 사고론은 압도적으로 백인·남성·중산층 중심의 가치를 반영한다. 형식은 닮았으나, 내용은 달랐다. 그럼에도, 차이를 인식했든 아니든, 빈약한 논리의 축복론을 편 조용기는 빠르게 슐러류의 적극적 가치론을 채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 조용기의 순복음교회는 빠르게 중산층적 가치로 재무장되었다.
‘적극적 사고’론은 비단 순복음교회만의 특징이 아니다. 적어도 1970~80년대에는 조용기식 적극적 사고론에 반신반의하던 교회들이 하나둘 미국적 번영신학을 수용했다. 이미 발 빠른 선각자들은 조용기만큼이나 빠르게 번영신학을 받아들였지만, ‘적극적 사고’론이 폭넓게 자리잡게 된 것은 1990년대, 특히 2000년대 이후다. 로버트 슐러의 (1993)에서 노먼 빈센트 필의 (2001), 릭 워런의 (2003), 조엘 오스틴의 시리즈(2005~) 등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출판시장을 휩쓴 이른바 ‘기독교 자기계발 서적’들은 ‘적극적 사고’론이 대형 교회 목회자만이 아니라 폭넓은 기독교 대중의 생각과 일상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 신은 축복을 선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예배는 신의 축복 메시지로 가득해졌다. 번역·출간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친 부르스 윌킨슨의 책 (2001)는, 마치 (2006. 한글번역본 2007)의 기독교판 메시지처럼, ‘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전형을 말한다. 여기서도 긍정주의가 넘쳐난다. 예배는 그러한 의 확대판과 다름없다.
또한 신은 예배당 밖으로 나왔다. 교회는 예배당 중심이 아니라 각종 소모임을 운영하는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노인 프로그램, 결혼생활 프로그램, 신랑·신부 프로그램, 그 밖의 각종 테마별 모임이 만들어졌고, 이들 소모임은 적극적 사고론을 구체화하는 장이었다. 하여 교회의 재건축 사업은 예배당 못지않게 종합문화센터와 같은 구성의 건조물을 만들어냈다. 구역모임이나 직장 신우회에서도 적극적 사고론에 기반을 둔 교재들로 축복신앙이 되새김질되었다. 하여 이 축복의 신은 성도들의 삶 구석구석으로 침투했고, 성도들은 이런 긍정주의 신앙에 의해 자신의 생각을, 삶을 조직해갔다.

당신은 성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런데 적극적 사고론은 비단 기독교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는 이런 자기계발 담론이 범람하고 있다. 을 저술한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후기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자기관리 양식과 관련이 있다. 종교개혁자로 근대 초기 자본주의 신학을 구축한 요하네스 칼뱅적인 절제와 자기통제보다는, 갖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그것은 정당하며 그러면 실제로 갖게 된다는 욕망의 원리가 지배적인 사회의 가치라는 것이다.

기독교식 자기계발서들이 2000년대 한국을 강타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왼쪽부터).

기독교식 자기계발서들이 2000년대 한국을 강타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왼쪽부터).

에런라이크는 이런 긍정의 담론이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전가’하는 효과를 지닌다고 비판한다. 즉 시스템은 공정하며, 실패는 개개인의 무능력과 과오에 대한 사회적 처벌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극적 사고론의 신은 후기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자본과 같은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 신은 축복을 받을 만한 성공을 이룩한 이를 축복한다. 하여 축복받을 만한 이의 존재가치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축복을 받지 못한 자에게는 채찍을 휘두른다. 신앙을 굳건히 하라고. 그것은 곧 자본의 원리에 충실히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2007년 여름 노동계를 뜨겁게 달군 이랜드의 홈에버 비정규직 해고 사태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랜드를 옹호한 기독교 이론가들의 생각은 흥미롭다. 그들은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것이 자본 간 경쟁에서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해고자를 포함한 노동자 전체에게 이익을 선사해줄 것이며,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자본의 해고 행위는 공익적이라고 주장한다. 축복받을 만한 자를 축복하는 신은 자본 간 경쟁에서 유리한 일체의 기업 행위를 축복한다. 또한 비정규직 같은 축복받지 못한 이들에게는 채찍을 주고, 축복받은 이가 그들에게 축복을 나눠줌으로써 사회적 공익이 실현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여 이 축복의 신은 실패에 대해 몰인정하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계발적 긍정의 담론이 실패를 개인화하는 것처럼, 적극적 사고론의 신은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실패를 구조화하는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거나 책임을 갖지 않으려 한다. 긍정의 담론이 시스템은 공정하다고 주장한다면, 긍정의 신학의 신은 그러한 시스템의 창조자이자 관리자다. 하여 시스템은 신의 법칙으로 운위되고 있다. 거기에서 탈락한 자는 채찍을 맞고 자본의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를 배워야 하며, 그러할 때 그들에게도 축복이 내릴 것이라는 얘기겠다.

이러한 자본이 된 신은, 사람들의 머리칼 수까지도 헤아린다는 신적 앎의 속성(마태복음 10,30; 누가복음 12,7)을 소비사회적 욕망의 원리를 통해 실현한다. 신은 소비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을 위해 자기를 규율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규율하는 행동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자기를 통제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그런 노력의 대가로 지불되는 신의 축복을 확신한다. 또한 노력을 게을리한 이는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며 자책감, 곧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이러한 축복과 채찍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자본이 된 신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어디에서든 언제나 자신의 원리를 잣대로 하여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관여한다. 그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하다. 요컨대 자본이 된 신은 자본의 원리를 통해 신적 능력을 갖춘다. 여기서 ‘자본이 된 신’은 ‘신이 된 자본’과 하나로 만난다.

교회 신자 수 부익부 빈익빈

이제 처음의 문제제기로 돌아가보자. 권리의 주체이자 욕망의 주체로 부상한 시민이 교회를 이탈하거나 친화적 감정을 철회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한 교회의 대응 전략의 하나는 신학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신이 재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에 돌입한 한국에서 신은 자본이 되었고 그 자본은 신이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재구축은 앞서 보았듯이 대형 교회적 현상이다. 미국의 번영신학 자체가 메가처치의 신학이듯, 그것을 수입해 유통한 한국의 교회들도 주로 대형 교회였다. 물론 중소형 교회들도 이러한 신학을 다루는 책을 열광적으로 소비했고, 적극적 사고론에 기초한 예배와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하지만 메가처치의 신학이 중소형 교회에 안착하려면 좀더 창의적인 재해석이 필요한데, 대개의 교회는 그러한 창의적 해석 능력을 결여했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미국식 교인 프로그램의 디테일이 충분한 인적·물적 자원의 지원 아래 구성된 탓에, 중소형 교회가 그것을 곧이곧대로 사용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하여 적극적 사고론으로 득을 본 교회는 대개 대형 교회들이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정체 및 감소 추세를 경험한 것은 대개 중소형 교회였고, 많은 대형 교회는 오히려 교인이 증가했다. 필경 이 증가분은 대부분 교회 간 이동으로 인한 것이다.

한데 말했듯이 적극적 사고론의 신은 실패에 대해 냉혹하다. 마찬가지로 그런 신학을 주장하는 대형 교회들에서 실패의 장소는 사라졌다. 실패자들이 교회에 남아 있으려면 성공한 이들이 나눠주는 구호품의 불쌍한 수혜자로서, 교회의 변두리에 비굴하게 빌붙어 있어야 한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대형 교회들은 빠르게 중·상위 계층 중심의 공간으로 재편되고 있다. 나아가 교회는 교회 안뿐 아니라 사회의 제도화 과정에 개입해 성공한 자들 중심의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사회의 가장 보수적 세력의 축을 형성한다.

이러한 자본이 된 신, 신이 된 자본이 구현하고자 하는 복음화는 모든 이에게 축복이 주어지는 신의 세상을 만들려는 데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대형 교회 중심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진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빠르게 양극화하고 있고, 그 정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단연 최고 수준이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체험하게 한다.

결국 시민의 반감 사는 교회

더욱이 상대적 소수의 가치가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로의 통합이 잘 진행되고 있다면 모르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도 사회적 통합이 극도로 이완된 분열 상황에 놓여 있다. 사회는 거의 모두를 성공을 위한 질주에 매달리게 하면서도, 그로 인한 즐거움보다 죽음 같은 고통의 체감이 현저하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성공적인 사람이나 실패한 이들 사이에서 지배적 질서에 대한 반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고, 반감을 표현하는 언어 또한 고도화되고 있다.

교회의 경우는 더욱 두드러진다. 교회는 이러한 후기 자본주의적 지배체제의 중심이면서도 비판하기 쉬운, 약한 고리처럼 여겨지고 있다. 해서 교회에 대한 비판은 지배체제의 어느 영역보다 날카롭고 통렬하다. 점점 교회는 이웃 없는 종교가 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그렇게 처신한 탓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외부도 교회를 그렇게 적대시하고 있다. 신이 된 자본, 자본이 된 신의 사회를 지향하는 교회에 대해 시민 K는 점점 적대적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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