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글들에서 보았듯이 최근 한국 개신교는 시민사회로부터 집중적 성토를 받고 있다. 이는 개신교 내부에서 대안교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모색을 낳았고, 그 시도들의 기저에는 규모 중심의 성공주의에 대한 성찰이 깔려 있다. 이 연재를 마무리하는 두 편 중 첫 번째인 이 글은 이러한 성찰과 모색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가능성을 ‘작은 교회’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대형 교회에 대한 문제제기가 확산되고 그 대응 모델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며 ‘작은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한 설교에서 조용기 목사는 “작은 교회 목회자는 실패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한 달 뒤 번역 출간된 데이브 브라우닝 목사의 책 제목은 공교롭게도 이다.
브라우닝은 국제CTK교회(Christ the King Community, International)의 창설자다. 그가 고안한 운영 원리를 따르는 초교파적인 교회들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국제CTK’다. 현재 7개국 12개 도시에 CTK교회가 있다. 유명한 복음주의 그리스도교 저널인 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교회의 하나로 CTK교회를 선정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도 중앙성전과 지성전의 개념을 통해 20개 지역교회를 두고 있다. 이들 지성전은 2009년 ‘제자교회’라는 이름으로 모교회로부터 분립된 독자적 교회로 재정립됐지만, 여전히 사실상 중앙성전의 직접적 영향권 아래에 있다.
성공적인 교회 모델을 구현한 인물로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두 인물은 서로 정반대의 주장을 편다. 하나는 권력집중화의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분산화의 모델이다. 하지만 양자는 그리스도교 팽창주의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브라우닝의 한국어판 제목이 ‘작은 교회’ 예찬론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주장의 요체는 ‘작음’에 있지 않다. 이 책의 원제에서 보다시피(Deliberate Simplicity: How the Church Does More by Doing Less) 핵심은 ‘단순성’(Simplicity)에 있다. 양자는 성과 중심적인 효율성을 강조하는 경영학적 모델로서 교회론을 양분시킬 뿐 신학적 깊이에 대한 논의의 여지가 많지 않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11년 7월29일치), ‘작은 교회 살리기 운동’을 벌이는 한 중·대형 교회의 박아무개 목사는 지난 10년간 거의 1천 개에 이르는 작은 교회를 지원했는데, 그의 소신은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은 작은 교회가 건강할 때 유지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선정된 교회의 목사 부부가 훈련서약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내용 중에는 성인 100명이 출석할 때까지 휴일 없이 전도한다는 것, 주 5일 이상, 매일 4시간 이상 전도한다는 것 등이 포함돼 있다. 여기서 박아무개 목사의 ‘작은 교회가 건강해진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작은 교회가 큰 교회가 되는 일이 흔히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겠다. 또 그가 생각하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은 교세가 계속 확장되는 것이겠다. 또 다른 성공지상주의인데, 오직 성장을 위해 모든 자원을 투여하는 포교 방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한국 대형 교회와 닮았고, 중앙성전-지성전 시스템이 아니라 원리를 같이하는 독자적인 교회운동을 활성화하는 점에서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CTK 운동의 한국판처럼 보인다. 하여 박아무개 목사가 말하는 ‘작은 교회’론은 크기가 아직 작을 뿐 큰 교회를 모델로 하는 ‘짝퉁 대형 교회’론에 불과하다.
매개 장치 불필요한 작은 교회
한데 이 책의 번역서를 펴낸 출판사(도서출판 옥당)는 흥미롭게도 이것을 ‘작은 교회’론의 맥락으로 엮어버렸다. 그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에른스트 슈마허의 책 (Small is beautiful)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다. 이러한 제목 잡기의 테크닉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반성과 ‘작은 것’의 추구를 통한 수평적 관계 중심의 교회론 성찰의 맥락에서 이 책을 해석하게 하는 창의적 수용자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편집자는 한국 개신교 내에서 일고 있는 ‘작은 교회’ 주장들을 참조했을 수 있다. 아직 신학적으로 논지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젊고 진취적인 교회 사역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작은 교회’론은 ‘아직 덜 큰 교회’가 아니라 ‘작음’ 자체를 향유한다. 이때 ‘작음’의 함의는 이들이 벌이는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너무 다양해서 하나의 이념적·신학적 틀로 묶을 수는 없지만, 대형 교회 식의 성공지상주의를 지양한다는 점에서 많은 작은 교회들은 공통된다. 사람들과 나누는 더 인간적인 관계의 확장에 복음의 진수가 있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도 많은 작은 교회들은 일치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복음관이 ‘작음’을 고집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크기가 커지려면 대체로 성장주의적 프로그램에 매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작은 교회들이 펼치고 있는바 저소득계층 어린이방을 운영한다든가, 노숙인 생활공동체를 운영한다든가, 혹은 아웃사이더 노선의 신학을 교회화한다든가 하는 선교 방식으로 교회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여 작은 교회는 대형 교회 혹은 짝퉁 대형 교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제 나는 이러한 작은 교회들의 실천과 지향을 재정리함으로써 오늘 한국 교회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선 작은 교회를 정의할 때 지역성에 의존해서 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한국의 대형 교회와 중형, 그리고 소형 교회는 장소 분산성이 크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어느 교회든 특정한 지역적 장소에 귀속된 교인들에 의해 성격이 규정되는 교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 거의 모든 교회는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다. 이런 요소들은 ‘작은 교회’를 설명하는 충분한 요인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작은 교회와 중·대형 교회를 나누는 결정적 차이는 교인들 간의 소통을 위해 매개장치가 필요한지와 관련 있다. 중·대형 교회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연령별·거주지별·성별·직능별 대표자를 안배한 매개조직을 통해 교인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통합한다. 한데 이러한 매개조직을 통한 교회의 통합 형태는 오늘날 시민사회나 국가에 비해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다.
목사와 교인의 직접적·수평적 관계
반면 작은 교회는 소통을 위해 매개조직을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한 시스템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적인 의미는 그리 많지 않다. 그보다는 전임 사역자와 교인, 그리고 교인과 교인 사이의 직접적인 대면적(facible) 관계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서로 토론하고 합의하는 대화 과정보다는 감성이 얽히는 관계를 통해 깊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작은 교회는 일종의 ‘감성 공론장’(Emotional public sphere)의 역할을 한다. 최근의 많은 작은 교회들은 포도주를 함께 담근다든가 김장을 함께 한다든가 독거노인의 수발드는 일을 함께 한다든가 하는 일을 통해 어떤 지향성 아래 서로 수다를 떨고 이야기와 행동을 나누게 하는 방식으로 감성 공론장으로서의 성격을 더욱 강화한다. 반면 전도왕이나 성경암송대회 같은 과제를 놓고 경쟁하게 하는 운영 방식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많은 작은 교회들은 탈권위주의적 조직과 운영을 추구한다. 담임목사나 장로의 임기제를 도입한다든가, 담임목사와 장로의 일방독주의 틀인 당회 중심의 운영보다는 단기 임기로 선출된 운영위원들을 통해 합의적인 운영을 제도화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민주제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것은 매개조직을 없애거나 혹은 매개조직의 권력적 성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교회 운영이 가능한 사이즈에서만 의미 있는 조직화 방식이다.
나아가 이러한 탈권위적인 관계는 예배 전례(典禮)에서도 관철되곤 한다. 가령 설교 직후 교인들이 함께하는 설교 나눔을 통해 대화적인 소통을 강조하는 설교제도를 운영하곤 한다. 설교 못지않게 중요한 목사의 배타적 권위에 속하는 세례와 성만찬 예식의 집례권도 교인들과 수평적으로 나눈다. 축도 역시 목사만이 수행할 수 있는 배타적 권위 영역이지만 많은 작은 교회는 공동 축도를 관행화했다. 신과 교인 사이의 일방향적 관계에 교회 사역자인 목사가 중간 매개자로 군림하는 것이 교회의 일반적인 전례 신학이었다면, 최근 한국의 많은 작은 교회들은 좀더 대화적인 상호성을 구체화하는 전례와 신학을 고안해내려는 경향이 있다.
수평적 관계의 틀은 이웃을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에도 영향을 끼친다. 신앙을 통해 학습된 관계의 수평성에 대한 태도가 이웃과의 관계에도 나타난다. 특히 이웃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포교하는 일을 ‘영적 전쟁’으로 묘사하는 대형 교회 식의 공격적 선교를 포기하고, 이웃을 삶과 생각을 나누는 친구로서 대한다. 나아가 교회가 벌이는 선교적 과제, 가령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한다거나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등의 일에서 교회 밖 이웃은 동료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은 교회는 홀로는 실효성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여 이웃을 동료로 대하지 않으면 그 추구하는 바의 일을 수행하는 데 부족하다. 이웃과 동료가 될 때도 작은 교회는 이웃에게 군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교회는 이웃과 수평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론적 특권이 있다. 그런데 대형 교회를 꿈꾸는 짝퉁 대형 교회인 작은 교회들은 이웃을 적대화하고 나아가 이웃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경우에도 이웃을 통제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반면 최근의 많은 작은 교회들은 정복주의적 관계의 태도 대신 이웃을 친구이자 동료로서 수평적으로 관계를 나누려 한다. 바로 이 점이 지금 우리에게 작은 교회가 희망일 수 있는 근거다. 해서 많은 작은 교회들은 때로는 스님이나 가톨릭 신부 혹은 시민사회 활동가를 초청해서 편견 없이 그들의 식견과 지혜를 배우기도 한다.
사회복지로 최저생계 보장해야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두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작음’의 전략이 가능하려면 작은 교회의 전임 사역자의 생계가 가능하거나 그러한 꿈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팽창주의를 위해 올인하는 방식을 지양하자 많은 사역자는 다른 것에 활용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또한 교회 사역자가 교회 밖에 대한 생각을 유연하게 갖게 되자 많은 사역자는 이중 직업을 통해 생계의 부족분을 채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아예 전통적인 상설 모임 중심의 교회 형식을 해체하고, 커피숍 목회 같은 커피를 매개로 소비자와 대화를 나누고 생각과 삶을 나누는 이벤트적인 ‘흩어지는 교회’가 고안되기도 하고, 교리적 고백을 공유하지 않는 복지기구나 사회운동 기구 등에 전력하는 이도 자신의 활동을 무형의 교회의 목회 행위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아가 글이나 그림 등을 통해 혹은 사이버 공간의 활동을 통해 ‘무형의 교인’과 관계 맺는 것도 목회 행위에 속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교회관들은 교회 사역자가 생계 전략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작은 교회 사역자의 최저생계 문제는 교회 성장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최저생계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보완되어야 할 일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하여 많은 작은 교회 사역자들은 소득신고를 하며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다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가난한 교회 사역자도 사회복지의 수혜 대상이 되는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다. 요컨대 작은 교회는 사회의 공공성 영역에서 의미를 나누는 교회를 추구한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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