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글에서 1970~80년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을 당시 대형화된 교회의 두 축인 월남자형 대형교회와 새로운 유형의 대형교회를 대조하면서 이야기했다. 전자가 대형화되는 데는 정치적 유착이 큰 요인이 되었지만, 후자는 사회적·경제적 요소에 방점이 찍힌다. 지난번에는 월남자형 대형교회인 영락교회의 성장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주로 새로운 대형교회인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이 시대의 양적 성장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초점은 이농민들의 광범위한 개종 현상이었다. 특히 기층 대중의 대대적인 흡수가 교회 성장의 결정적 밑거름이었음을 말했다. 반면 이 글에서는 월남자형 교회인 영락교회를 축으로 하는 기성 주류 교회들의 양적 성공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말했듯이 이 교회들의 성장은 정치적 유착에 힘입은 바 크다. 지난 글에서는 군대에서 이뤄진 선교에 관해 간략히 말했다. 이번엔 대규모 부흥집회와 관련해 일어난 시민층의 개신교화를 중심으로 다루려 한다.
빌리 그레이엄, 그분이 오셨네
조용기 목사는 서북계 장로교의 근본주의 신앙에서 영향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나운몽의 기도원 부흥운동의 계보에 있는 부흥사였다. 그 역시 반공주의적 신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성장의 발동기로 활용해 대형교회를 만들었다. 지난 글에선 이것을 ‘기도원운동의 교회화’라고 규정했다.
기도원이 대중을 일상의 장소성 밖으로 호출해내는 탈장소적 신앙공간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파라처치’(Para-Church·선교단체)적 공간이라고 한다면, ‘로컬처치’(Local-Church)인 교회는 대중을 붙박이 공간 속으로 불러모은다. 로컬처치에서 중요한 것은 항구적인 지역조직이다. 순복음교회 지역조직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지난 글에서 말했듯이, 구역장이다. 이들은 단순한 교회의 하부조직 담당자가 아니라, 하부조직을 성장주의적 동원체제로 추동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과 새마을운동 지도자는 역할이 유사했다. 간증 같은 성공신화의 구연 행위는 발전동원 체제를 바닥에서 조직해낸 담론 기제다. 순복음교회의 구역장과 새마을운동 지도자는 그 시대의 체제 내화된 성장주의적 ‘구술 전승자들’인 것이다.
이런 교회화된 부흥회와 구역장 체계 등으로 인해 도시 하층민으로 편입된 이농민의 대대적인 흡수가 가능했다. 그리고 구역장을 통해 미시적 성공 담론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대형교회는 형성됐다. 순복음교회는 이렇게 성장한 교회 유형을 상징한다.
반면 영락교회 같은 주류 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은 이농민의 흡수보다는 시민층의 신자화 결과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말은 순복음교회에는 시민층의 유입이 적었다는 뜻이 아니라, 시민층의 신자화를 추동한 것이 영락교회를 축으로 하는 주류 교회였다는 얘기다. 후자의 성장에는 초대형 전도집회가 중요한 계기가 된다.
1973년 5월16일∼6월3일 미국의 유명 목사를 초빙한 ‘빌리 그레이엄 한국전도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전국 9개 도시를 순회한 뒤 서울에서 5일간 연속 집회를 열었는데, 20일도 안 되는 기간에 연인원 450만 명이 동원됐고, 특히 마지막 집회 때는 110만 명이 여의도광장에 몰려들었다. 이 전도집회에서 3만6천여 명의 회심자가 생겼다. 또 이듬해에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한 ‘엑스폴로 74 전도대회’가 열려 6일간 참여한 연인원이 무려 655만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1980년 ‘80복음화대성회’에는 일주일 동안 무려 1700만 명의 대중을 모았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엄격히 통제되던 군사정권 시절에 이런 대규모 전도대회가 열렸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은 입국하자마자 대통령과 면담을 했다. 이것은 전도집회가 정부의 적극적인 비호와 협조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데 월남자형 교회나 ‘파라처치’를 이끌던 한경직(영락교회 목사), 김준곤(한국 대학생선교회 총재) 등의 인물들이 이 행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반공주의의 주역이고, 미국 보수 정계와 네트워킹을 가졌으며,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 신자 규모에 비해 월등한 사회적 자원을 차지하고 있던 주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대형 집회는 불가능했다. 더구나 한-일 수교나 3선 개헌 정국에서 한경직 등 교회 지도자들이 반정부적 태도를 보인 것은 유신체제를 막 시작한 정부에 부담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회유하는 게 정권의 큰 과제였음이 분명하다. 빌리 그레이엄 자신도 놀랄 만큼 전례 없는 정부의 호의로 이 집회는 가능했다. 그 결과 교인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펄쩍펄쩍 뛰는 한국식, 고요하고 우아한 미국식물론 조용기 등 부흥사들도 대규모 부흥집회 참여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대대적 부흥집회는 한국의 전형적 부흥집회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띠었다. 이른바 ‘미국식 부흥집회’가 열린 것이다. 여기서 조용기식 부흥집회와 미국식 부흥집회의 대조되는 풍경을 살펴보자.
징과 북에 의한 반복적 리듬이 긴장과 이완을 주면서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한국의 전형적 부흥집회에는 대중이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며 펄쩍펄쩍 뛰는 동작이 추임새처럼 곁들여진다. 그리고 질서와 해체가 수없이 교차한다. 함께 보조를 맞추며 행동하다가 누군가 “주여, 주여” 하며 큰 소리로 외치며 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또 누군가는 두 손바닥으로 땅을 치며 대성통곡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바닥을 나뒹굴며 경련을 일으킨다. 부흥사는 이런 돌발변수들을 부흥사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활용하면서 대중의 반응을 유도한다. 그때마다 대중의 광기는 폭발하듯 발산된다. 광기가 뿜어내는 종교적 에너지를 집중시킴으로써 부흥사는 기적술사로 돌변하며, 그 결과 병치료의 기적이 일어난다.
반면 미국식 부흥집회는 기타와 드럼, 전자오르간을 주요 악기로 하여 영가풍의 멜로디 있는 음악으로 대중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이 음악은 주변의 다사다난한 관계의 망에서 일시적인 정화를 얻게 하며, 오직 종교적 감성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부흥사는 자신에게 침잠해 있는 대중에게 다가가 내면의 죄를 호출해낸다. 순간 사람들은 죄를 자각하며, 종교로 귀의하는 힘이 몸을 감싸는 느낌에 젖는다.
이제 남은 것은 종교적 귀의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부흥사는 모두를 눈감게 하고, 조용히 그들 내면을 노크한다. 마음 문이 열리면 손을 들게 한다. 아직은 누구도 모르는, 자신과 부흥사만이 아는 행동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며, 앞으로 나오도록 이끈다. 그러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스태프들이 슬쩍 그이들 옆에 다가와 손을 잡고 기도와 노래를 한다. 그리고 전체 대중이 함께 손을 잡고 허공을 좌우로 흔들며 축하 노래를 불러줌으로써 집회는 막을 내린다. 이후 그들은 스태프들의 인도로 각 교회와 파라처치의 일원으로 편입돼 훈육된다. 이들은 순복음의 구역장과는 달리, 성공주의의 전승자라기보다는 대화를 통한 멘토 역할을 한다.
이렇게 미국식 부흥집회는 존재를 바닥까지 들추지 않는다. 그런 에너지의 발산 대신, 세련된 종교적 감성에 몸의 일부를 위탁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기구의 일원으로 훈련받을 수 있게 조직화한다. 이것은 존재의 자원이 바닥까지 고갈된 사람이 아닌 이들, 기복에 기대지 않고 삶의 품위 유지가 가능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종교성을 보여준다. 시민계층의 대대적인 교회 유입의 계기는 바로 이런 미국식의 대대적 부흥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세련된 미국 모델로 청년층 유입한데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대규모 집회로만 실행된 것이 아니다. 개별 교회나 대학 캠퍼스 등에서 벌어지는 중·소형의 부흥집회가 크게 활성화됐고, 새로운 유형의 부흥사들이 탄생했다(여전히 전형적 부흥집회도 교회를 중심으로 수없이 열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나 미국 유학파, 혹은 명문대 출신 부흥사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병치료 능력보다는 모던한 화술을 활용해서 부흥회를 이끌었다. 세련된 외모, 지적인 발성과 언어 표현, 특히 영어 어휘 과용 등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한국 사회의 빠른 성장은 시민계층의 새로운 대중문화를 필요로 했다. 당시 TV 시대와 더불어 대량 수입되기 시작한 서양 대중문화는 한국인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미국식 부흥집회는 그 선망에 바탕한 모방 사례였다. 선진국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문화적 식민주의로 표현된 것이다.
아무튼 이런 형식의 부흥운동 활성화는 시민사회 내에서 교회의 이미지를 모던 공간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시민계층, 특히 청년 대학생층이 대대적으로 교회에 유입되는 배경이 되었다. 한데 시민의 신자화 현상은 교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제 더 이상 반공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의 교회로는 번성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매주 일요일 아침 주한미군방송(AFKN) 채널을 통해 방영되는 미국 크리스털 처치의 예배 실황에서 로버트 슐러 목사의 자유스러운 복장과 동작, 그리고 예배 순서의 자유로움, 여기에 예배당 안의 모던함과 교회 앞뜰 잔디에 앉아 예배에 참여하는 공간 파괴적 평온함은 마치 복음주의를 안정되고 자유롭고 평온한 삶 자체인 듯 가체험시켰다.
여기서 신앙은 곧 미국이었고, 한국 교회의 모델은 곧 미국 교회라는 생각이 영상을 통해 지각됐다. 그런 맥락에서 순복음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 담론에 로버트 슐러식 적극적 사고를 결합해 자기 긍정의 개발주의 신앙을 유포했다. 또 영락교회 등 대형교회들은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면서 예배당을 재건축하고, 프로페셔널한 성가대를 운영하며, 수준 높은 지적 설교를 위해 설교 준비 용역까지 활용했다. 병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목회자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여전히 한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른바 고급화된 시민적 교회를 구현하고 있었다.
오! 꿈의 나라 미국요약하자면, 1970~80년대 기층 대중의 신자화는 병치료와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신앙화하면서 대대적인 성공을 이룩했다. 반면 이 시기에 시민계층의 대대적인 신자화 현상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풍요를 향한 적극적인 자기개발 담론의 신앙이 유효했다. 후자에는 선진국의 풍요를 공유하고 싶다는 소비주의적 판타지가 게재돼 있다. 당시는 아직 한국 사회가 소비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이다. 풍요로운 소비는 꿈으로만, 판타지로만 존재하던 시절이다. 그때 국가는 그런 판타지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뤄내려 했다. 교회는 AFKN을 통해 국가보다 더욱 생생하게 판타지를 선교 자원으로 활용했다. 미국주의는 1970~80년 대부흥기에 이렇게 문화적으로 체감됐고, 이것은 ‘무의식의 식민주의’가 교회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 안착된 주요 배경도 되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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