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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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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기독 청년 풍요의 신학에 취하다

단기선교·아동후원 통해 은혜의 공여자로 느끼게 하는 풍요의 신학
중산층에 ‘값싼 은혜’ 주는 교회판 선진화 담론과 다름없어
등록 2011-08-03 14:35 수정 2020-05-03 04:26

산업사회로 질주하던 시절, 교회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주의를 가장 잘 체현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공동체성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자 교회 신앙 속에 담긴 이념이었다. 하여 성공한 자에게는 축복을 주었지만, 실패한 자에게도 위로와 재활의 메시지가 설파됐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반면 소비사회로의 빠른 전환기에 교회에는 ‘적극적 사고’로 삶과 신앙의 스펙 쌓기에 최선을 다하는 육체들이 부각된다. 실패한 몸에게는 무관심과 냉대만이 있다. 말했듯이 실패한 자들의 공간은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이렇게 교회는 현저히 중산층화하고 있다.

소망교회의 외양, 수십년간 변함없는 정형화된 예식은 소박한 신앙문화를 상징한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결혼시장’이라는 이면도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소망교회의 외양, 수십년간 변함없는 정형화된 예식은 소박한 신앙문화를 상징한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결혼시장’이라는 이면도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선교사를 넘어 부모가 되는 체험

지난 글에서 단기선교가 자본주의적 성공지대에 선 이들의 자긍심이 낳은 것임을 말했다. 그 얘기를 좀더 해보자. 실패한 지역에 성공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나눠주겠다는 호혜성이 해외 선교의 붐을 일으켰다.

실패의 지대는 해외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교회의 선교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회는 전환의 비용을 치르기보다 좀더 손쉬운 대안을 발견했다. 더욱이 가까운 곳에서 호혜성을 실천하기란 먼 곳에서보다 어렵다. 실패로 인한 고통은 단지 먹을거리 차원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몸 전체로 퍼져나가며 심지어 주변에도 그 독성을 퍼뜨린다. 선교란 그것 전체를 고스란히 품에 안아야 하지만, 교회는 가벼운 호혜적 품성으로 나눔의 만족감을 얻는 길을 택했다. 먼 곳의 고통은 잘 보이지 않으니 가벼운 만족감을 느끼는 것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국내 선교를 위한 기금은 줄거나 정체된 반면, 해외 선교를 위한 기금은 크게 늘었다. 신앙적 나눔을 꿈꾸는 기독 청년들은 너도나도 해외 선교를 경험하려 했고, 적잖은 이들이 방학과 휴가 때만 되면 습관적으로 단기선교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소비사회가 발전할수록 소비 품성은 사람들의 뼛속까지 파고든다. 소비하지 못하는 자는 존재감 붕괴에 빠져드는 사회가 되었다. 한편 지구화의 광풍은 생존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치열한 경쟁사회로 몰아갔다. 소비 품성을 만족시키려면 치열한 경쟁에서 승자가 되어야 했다. 하여 사람들에게 호혜적 품성이란 점점 낯선 것이 됐다. 더 소비적이고 덜 안정적인 청년층은 말할 것도 없다.

한데 놀랍게도 많은 기독 청년들은 그런 무한 경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의 후방지대를 (향락적 소비가 아닌) 그들 식의 호혜적 실천에서 찾으려 했다. 바로 단기선교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종교적 열정의 소산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치열한 경쟁에서 조금 자유로운, 여유 있는 계층적 특권의 소산이다. 이렇게 열정과 특권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른바 ‘착한 (기독) 청년’이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단기선교뿐 아니라, 해외 원조형 선교기관들이 기획한 입양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한다. 물론, 알다시피, 이것은 실제 입양이 아니다. 아동에 대한 지정후원을 입양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입양부모의 헌신과 사랑을 극도로 간소화한 것을 입양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후원자는 부모가 되었다는 자의식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정후원은 단기선교와 비슷한 구조다. 약간의 호혜성을 실천하는 것으로 선교사가 되고 부모가 된다.

타인을 풍요롭게 해 자신도 풍요로워진다는 신앙이 중·상위층 기독 청년에게 호소력을 키워가고 있다. 강준민 목사의 <풍부의 법칙>은 그런 경향을 대표한다.

타인을 풍요롭게 해 자신도 풍요로워진다는 신앙이 중·상위층 기독 청년에게 호소력을 키워가고 있다. 강준민 목사의 <풍부의 법칙>은 그런 경향을 대표한다.

이렇게 소비사회에서 여유를 호혜 형식으로 지출하는 ‘착한’ 존재 방식이 기독교 신앙 제도로 발명됐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호명한다. 그것은 ‘원죄’와 관련됐고, 따라서 임의적인 노력을 통해 해소될 수 없다. 그리고 종교개혁 전통은 가상의 해소법을 제공해주었다.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가 그것이다. 나치에 저항하다 처형당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를 ‘값싼 은혜’라고 불렀는데, ‘값싼 은혜’의 신앙은 ‘소극적 주체’를 낳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계에서 적극적인 존재일 수 있는 것은 신이 우리를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 살아가라는 소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자를 위한 풍요의 신학

최근 한국 교회는 새로운 방식의 신앙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값싼 실천’으로 적극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신앙이다. 그리스도 은혜의 수혜자일 뿐 아니라, 그 은혜의 공여자라는 자의식이다. 신의 품성에 속하는 선교사나 부모의 품성을 가진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그 ‘값싼 실천’을 위한 비용을 기꺼이 지급할 수 있는 이는 대개 신앙적 열정과 사회적 특권을 함께 가진 이들이라는 점이다.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혹은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중·하위 계층 청년들에게 그것은 어려운 선택에 속한다.

고속성장으로 근대를 이룩한 우리 사회에서 풍요의 문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다면 ‘졸부 문화’ 정도다. 하여 한국에서 민주적 제도화는 대중의 ‘평등’에 대한 강한 요구와 맞물려 있었다. 반면 중·상위 계층은 자유민주주의, 아니 자본주의를 강조했다. 어떤 사회든 특권은 불가피하며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응하기보다 서로를 할퀴면서 제도화됐다.

그런데 민주정부 아래서 추진된 제도화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냈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종식됐다.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는 성공이었고, 그것이 MB 정부를 낳았다. MB 정부의 초기 슬로건 중 하나는 ‘성장’이 아니라 ‘선진화’였다. 졸부형 성장이 아닌 ‘품격 있는 성장’을 강조한 것이겠다. 물론 실제는 날조에 가까운 슬로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했고,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 또한 존재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을 시사하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포착되는데, 하나는 웰빙 문화가 중·상위 계층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먹을거리를 필두로 생활습관, 주거, 사적·공적 관계 양식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중산층의 신사화’(Gentrification of Middle-class) 현상이다. 소비 패턴에서도 과시적 소비가 아닌 검약하고 실용적인 소비 현상이 중·상층의 소비 패턴에서 일부 엿보인다. 교회 언저리에서 나타나

는 신앙 담론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꽤 알려진 복음주의자이자 목사인 강준민은 ‘풍부의 법칙’이라는 말을 유포한 장본인이다. (2007)을 보면, 풍부의 신학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지를 말해온 조용기를 필두로 하는 이제까지 대형 교회의 신학과는 사뭇 다른 관점을 강조한다. 조용기 등은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에 매진하라고 권고했다. 반면 강준민은 타인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실천이 자신을 풍요롭게 한다는 주장을 편다. 조용기 등에게서 풍요가 목적이었다면, 강준민은 풍요를 과정으로 주장한다. 전자가 목적을 위한 도구적인 삶과 신앙적 적극성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도덕적 실천 과정을 강조한다.

그런데 조용기 주위에는 도시로 이주한 수많은 빈곤층 대중이 있었다. 그들은 절박한 궁핍과 만연한 질병 속에서 신앙을 통한 풍요로운 삶을 갈망했다. 반면 강준민의 책을 읽는 대중은 이미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이 독서층 가운데 대다수는 빈곤에서 풍요를 이룩한 1세대가 아니라 그 뒤의 세대다. 그들은 날 때부터 풍요로웠고, 궁핍은 간접적 체험을 통해 겨우 얻을 수 있는 ‘타인의 삶’에 지나지 않았다. 강준민은 이런 사람들에게 도덕적 실천이 풍요를 선사한다는 메시지를 설파한 것이다.

풍요의 얼굴, 구태의 뒤태

소망교회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모순적으로 중첩된 대표적인 교회다. 목사의 메시지는 졸부의 천박한 성공에 대한 비판으로 넘쳐났고, 그것 못지않게 검약하고 실용적인 신앙문화의 요소가 도처에서 도드라진다. 가령, 많은 대형교회들의 주보는 올컬러의 화려한 인쇄에 교회에 대한 과시적 드러냄의 욕망이 구석구석에서 넘쳐난다. 반면 소망교회의 주보는 흑백 인쇄에 간결하고 소박하며 실용적인, 그러면서도 세련된 구성이 엿보인다.

결혼예식도 마찬가지다. 교회 운영에서 신자들의 결혼은 중요한 요소다. 많은 대형 교회들에 주례 전담 목사가 있어 되도록 많은 교인들의 결혼예식을 주관하려 하고, 의례적이기보다는 이벤트적 성격이 강하다. 일부 결혼식은 상류사회의 과시적 혼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반면 소망교회에서는 결혼예식이 한 주에 두 차례만 교회의 부속 공간에서 수행되며, 모두 담임목사가 집례한다. 어느 예식도 내용과 형식, 실내장식이 거의 다르지 않고 예전적이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모두 같아 보이듯, 결혼예식만으로는 계층적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정형화된 형식에 의존한다.

예배당의 공간 배치에서도 수십 년간 변함없는 실용적이고 소박한 외양을 고집한다. 예배 시간도 시간강박증에 걸린 이들처럼 정확하게 시작하고 끝내며, 예배 본당에는 교인들의 ‘아멘’이라는 전형적인 화답구도 안 들릴 정도로 엄숙하다. 교회 프로그램도 간소해서, 교인들은 교회에서 확대가족이 만나는 기회를 얻는다. 빠르게 변화하고 바쁜 사회에서 이 교회는 마치 후방지대의 쉼터처럼 주일을 활용한다. 해체와 과속성(Speedity)을 특징으로 하는 모던 공간의 한가운데인 서울 압구정에서 느림과 정형성을 강조하는 독특한 신앙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이 교회에는 한국적 근대성이 담아내는 문화와는 다른, 나의 표현으로는 ‘웰빙신앙문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대거 교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원로목사로서 아직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전임 담임목사가 보여주는 다른 캐릭터에 놀라게 된다. 그는 웰빙신앙문화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고, 한국 교회의 비자금 형성 능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지극히 구태스럽다. 또 한국에서 몇 대밖에 없는 스포츠카를 몰고 다닐 만큼 소비 성향이 강하고, 교회 기금으로 자기 아들에게 다른 대형교회를 만들어주었다. 일종의 변칙 세습을 한 것이다. 또한 이 교회는 ‘한국 최고의 결혼시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계층적 특권성이 강한 청년모임을 운용한다. 게다가 ‘고소영’이라는 말에서 시사되듯, 정실주의의 온상이다. 필경 이는 현 정부의 인사에서 나타난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특권집단의 온갖 정실주의가 작동하는 하나의 주된 매개가 소망교회이었기에 현 정부의 고소영 내각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비민주적 특권주의가 판치는 공간의 한가운데에 이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개신교판 중·상류층 미학화

졸부형 대형교회가 지배적 현상인 가운데, 강준민식 풍요 문화를 시도하는 현상이 대형교회 언저리 여기저기에서 출몰한다. 앞에서 나는 그것을 한국 사회의 중·상위 계층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중상류층 미학화’ 현상으로 해석했다.

선진화 담론이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그런 현상의 정치적 버전이라면, 그 신앙적 버전 또한 소망교회의 목사 간 폭력 사건에서 보듯 아직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유의 신앙의 사회화는 점차 한국 교회 보수층의 주요 문화로 자리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웰빙적 신앙문화를 선도한 일부 대형교회(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 등)뿐 아니라, 풍요의 신학을 교회 성장 담론이 아니라 교회 개혁 담론으로 발전시키는 이들, 즉 청부론자(淸富論者·한국기독교총연합회해체론자 등)가 빠르게 대중적 지명도를 높이는 것에서 그런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중간층의 하향 추세가 극명해지는 우리 사회에서, ‘깨끗한 부자론’ 같은 중·상위 계층적 신앙의 미학화는 MB 정부의 선진화 담론처럼 시민 호도용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에게는 복음일 수 없기 때문이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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