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신사참배는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한데 해방을 전후로 한 시기에 ‘자기에 대한 수치심’은 ‘타자에 대한 증오심’, 곧 ‘고강도의 반공주의’로 전환됐다. 이것은 테러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파괴의 심성’이었다고 지난 연재에서 밝혔다. 이번엔 전쟁을 거치면서 증오심이 ‘파괴적인 심성’에서 ‘생산적인 심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해 다루려 한다.
증오와 함께 위로를 구하다
그리스도교 역사학자 김흥수는 한국전쟁 이후 기복신앙의 양상에 관한 연구에서 통념과는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기복신앙이 한국의 전통적 대중문화를 무성찰적으로 흡수한 결과가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적 병리 현상과 관련돼 있다고 보았다. 기복신앙과 성장주의의 연관성을 지적한 것이다.
결론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한국전쟁을 보는 그의 시선에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대중의 고통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수행했다. 문학을 제외하면 대중의 ‘고통 감성’에 초점을 두는 것은 한국전쟁 연구에서 여간해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그가 주목한 감성은 ‘생존 욕망’이다.
한국전쟁은 전세계의 어떤 국지전에서도 볼 수 없는 혹독한 살육과 파괴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런 파괴성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죽음 같은 굶주림, 자연재해(태풍·가뭄·홍수), 전염병(결핵·나병·뇌염 등) 등 재앙은 1950년대 내내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옥죄었다. 게다가 독재정부 치하에서 벌어지는 정치테러 또한 끊이지 않았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개신교에서는 ‘사탄론’과 ‘이단론’이 극성을 부렸다. 김흥수는 이 현상을 생존 욕망과 연관시켜 해석한다. 그는 당시 설교나 각종 기고를 분석해 이즈음 개신교 지도자들의 담론 속에 사탄론이 현저하게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무수한 이단이 1950~60년대에 속출했다고 분석했다. 그가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악마화하는 교파 분열 또한 1950∼70년대에 극심했다(장로교만 49개 교단으로 분열된 것을 포함해 개신교 교단이 60여 개가 될 정도였다). ‘파괴’는 전후에도 여전히 시대의 심성적 기조였던 것이다.
김흥수의 설교 분석에 바탕하면, 사탄론은 ‘선민 구원’ 담론과 강고하게 얽혀 있다. 식민지 말기에서 전쟁기까지 악마론은 공산주의의 박멸을 강조했다. 반면 전후 사탄론은 멸공의 언술과 결합됐지만 동시에 구원서사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증오심은 공격, 파괴에서 위로, 상흔 극복 등 ‘생산적’ 기조로 서서히 바뀌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대표적인 이단심판관이자 반공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목회자 박형룡도 전쟁을 거치면서 특유의 공격적 언술에서 후퇴해 “하나님만이 진정한 피난처”라는 실존적 위로의 메시지를 남겼다. ‘적’을 향한 비타협적 공격성의 언술은 여전했지만, 그것은 공산주의자가 일으킨 동족상잔으로 희생된 남한의 그리스도교 대중을 향한 축복의 약속으로 이어졌다.
정리하자면, 전후 한국 그리스도교는 남한 사회 전체에서 가장 반공주의적 증오심에 불타 있던 사회적 세력의 하나인데, 특기할 것은 이 증오심이 파괴적인 동시에 생산적인 심성적 기조를 띠었다는 점이다. 한데 이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종교 현상은 같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이른바 ‘이단들’이었다.
울부짖는 이단들의 부흥회
1954년 나운몽은 최초의 기도원인 용문산기도원을 설립해 이곳을 중심으로 부흥집회를 열었다. 그의 집회에서는 입신 상태에서 방언을 하고, 온몸을 전율하듯 떨기도 하며 바닥을 구르고, 울부짖듯 예언을 하는 등 엑스터시 상태의 각종 은사체험이 난무했다. 하지만 부흥집회의 하이라이트는 ‘치유’였다.
당시는 전후의 온갖 질병이 대중의 몸과 정신을 극도로 괴롭히던 때다. 그래서 몸도 영혼도 고갈된 사람들은 기도원의 대중집회에서 발광하며 상처를 치유받으려 했다. 나운몽의 부흥집회는 빠르게 전국화됐다. 그 자신이 전국을 다니며 집회를 열었을 뿐 아니라 제2, 제3의 나운몽이 각처에서 등장했고, 명상과 침묵의 기도가 아닌 울부짖으며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는 열광적 기도원이 속출했다.
그 무렵 박태선의 등장은 전후 대중적 신비주의 운동의 극치를 보여준다. 남산, 한강 백사장 등에서 열린 그의 집회에는 수십만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가 전국을 순회하며 벌이는 집회는 거대한 종교 페스티벌이 되었다. 개신교도 수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의 집회에는 개신교 신자가 아닌 이도 무수히 많았고, 개종자 또한 많았다. 아무튼 주목할 것은, 나운몽의 집회처럼 여기서도 무수한 신비체험이 속출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절정에는 영락없이 신체적 치유 행위가 있었다. 대구의 노광공은 박태선의 추종자였다가 독자적인 활동을 벌인 부흥사였는데, 역시 그의 집회에서도 치유는 대중의 열광을 최고조로 집중시키는 요소였다.
그 밖에 변계단·김성희 같은 여성 은사자들은 상처 부위로 판단되는 몸을 어루만지거나 때리면서 기도를 드렸고(안찰기도), 많은 이들이 질병에서 치유됐다고 주장했다. 안찰기도나 나운몽의 방언기도 등 열광적인 대중집회 풍경은 빠른 속도로 개신교 전역에 퍼져나갔는데, 확산의 배경엔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이 있었다.
여기서 하나 더 언급할 것은 이들이 예외 없이 ‘증오’를 신비체험, 특히 종교적 치유 행위의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대상은 ‘빨갱이’다. 하지만 분노를 ‘동력화’하되 그것으로 전쟁 혹은 유사 전쟁을 벌이던 해방 정국의 월남자 그리스도교 과격파들과는 달리, 이들은 분노를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치유하는 데 활용했다. ‘파괴적 증오심’이 아닌 ‘생산적 증오심’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이들은 전후 한국 사회의 부흥사였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활동은 주류 개신교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은 좀더 열광적으로 치유 행위를 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주류 교회의 배척과 모방그런데 이들은 미국적 근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서북계 개신교 주류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변두리 혹은 외부에서 등장했고, 거의 모두 정규의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 출신 지도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주류가 코드화한 언술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 흔히 사용하는 그리스도교적 키워드는 ‘성령’이다. 이 시기의 부흥사들도 그랬다. 그들은 모든 것이 ‘성령의 은혜’라고 주장했다. “치유받은 사람들은 은혜의 수혜자일 뿐이다. 그들은 한 게 없고 단지 받은 것이다”라는 것이다(그러나 기적체험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는 수혜자들의 호응 없이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주류 교단은 성령운동적 부흥집회의 주역인 평신도 지도자들을 예외 없이 이단으로 규정하거나 이단시했다. 박태선이나 노광공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나운몽은 단군설화의 한울님과 하나님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공자나 석가 같은 현인이나 예언자를 배척한 교회를 비판했으니, 개신교회 주류와 충돌을 면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필자는 이들의 주장과 행위에 대한 교리적 평가는 유보하고, 이들이 일으킨 운동의 사회적 효과에 주목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주도한 기도원과 부흥집회 현상은 전후 한국 사회 대중의 고통과 갈망 사이에 깊이 파고든 것이기에 가능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성격이 아니라 몸과 정신의 질병으로 생긴 고통에서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였다. 부흥집회는 바로 그런 대중의 고통과 대면했고, 거기에서 대중의 광적인 반응과 얽히며 폭발적으로 활성됐다.
앞서 지적했듯, 주류 교회는 이들을 배척했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교회는 모방을 시작했다. 이제 기도원은 주류 교회들 내부로 들어왔고, 부흥집회를 이끄는 부흥사들은 교회 안에서 그 일을 계속했다.
1960년대부터 전후 복구가 본격화됐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앞장선 전후 복구 수행 방식은 전시동원체제와 유사한 ‘발전동원체제’였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 사회적 가용자원을 총동원하는 방식이다. 흥미롭게도 이 발전동원체제는 반공의 증오심을 발전 동력으로 활용해 실행되는 체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기 개신교회와 국가 사이의 절묘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곧 ‘생산적 증오’의 메커니즘이 양자에서 유사하게 나타났다.
발전동원체제, 닮은꼴인 국가와 교회
1960년대에 시작된 발전 프로그램 덕에 1970~80년대 한국 사회는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그리고 교회도 같은 시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성장의 주역은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로 대표되는 부흥사적 목회자들이었다. 이들이 이끄는 교회와 이들을 추종하는 ‘한국판 십자군’이 성장의 중심에 있었다.
조용기 목사는 단시일에 세계 최대의 교회를 만들어냈다. 그는 나운몽으로 대표되는 전후 한국 사회의 제도권 외부 부흥사들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대체한 교회를 발명한 것이다. 교인의 일상 밖 공간인 기도원과 일상 안의 공간인 교회 사이의 융합과 분열을 교묘히 안배함으로써 이른바 ‘순복음신화’는 탄생했다. 순복음교회의 예배는 기도원을 옮겨놓은 것과 같은 분위기로 연출됐다. 여기서도 연일 벌어지는 치유가 그 핵심이었다.
사회는 빠른 속도로 산업화됐지만 사회적 안전장치는 사실상 부재했다. 이런 시기에 도시로 들어온 이농민에게는 계속되는 빈곤과 열악한 노동이 존재의 전부처럼 보였다. 더구나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난다는 것은 삶의 준거가 삭제됨을 의미했다. 고통을 해석하고 견뎌낼 만한 정신적·영적 자양분이 모두 거덜난 존재, 이것이 당시 이농민의 모습이었다.
조용기 목사는 이들에게 신의 치유를 선사하면서 ‘삼박자 구원’을 설파한다. 몸을 치유한 신은 동시에 풍요도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영적 축복이 있다. 몸과 정신의 치유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이들은 그의 메시지를 손쉽게 받아들였다. 마치 국가가 국민에게 발전동원체제의 충실한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고무하는 것처럼, 교회는 신자에게 자신과 가족의 발전을 위해 모든 가용자원을 활용하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많은 입지전적 성공담이 ‘간증’이라는 담론 형식을 통해 유포됐다. 그럼에도 실패는 어디서나 있었다. 기도원은 바로 실패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교회의 성공은 나운몽 등의 일탈적 성령운동을 교회적 성령운동으로 체제화함으로써 가능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로 집결된 심성적 기조는 성장 동력으로 전환됐고, 그것은 교회주의를 더욱 견고히 했다. 나아가 군부 권위주의 시대의 ‘국민화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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