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교회의 큰 화두 중 하나는, 어울리지 않게도, 해외 선교였다. 시민사회에는 ‘단군 이래 최대 재앙’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교회에는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됐고, 교회마다 해외 선교사를 파송·지원하는 붐이 일었으며, 심지어 너도나도 해외 단기선교를 통해 일시적 선교사가 돼보는 현상이 마른 가지에 불이 일듯 일어났다.
이 글은 이런 ‘선교입국의 광염’을 선교론적 관점이 아니라 위기의 사회심리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이것은 지난 글에 이어 시민이 교회로부터 철수를 시작하게 되는 1990년대 이후 교회와 신앙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살피는 두 번째 논의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지원금을 위한 과대포장</font></font>
2007년 7월23일,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이동하던 한국인 선교팀 23명이 탈레반에 납치됐다는 외신이 전세계로 타전됐다. 이 당혹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한국 시민사회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비상한 선교 현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과 배후를 캐묻는 가운데 사람들은 ‘단기선교’라는 생소한 말이 문제의 진원지에 있음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선교사’라는 말은 비상한 신앙적 선택에 속했다. 더구나 ‘오지를 향하는 해외 선교사’란 거의 순교에 해당하는 신앙 행위로 여겨질 정도다.
한데 ‘단기선교’라니. 인생을 다 걸기는커녕 단지 휴가 기간 정도를 바치는 가벼운 신앙심을 발휘한 사람들이 그 대단한 선교사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파송됐다. 그런데 그들이 방문할 선교지(宣敎地)는 그렇게 가벼운 곳이 아니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속한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이 가장 준비를 필요로 하는 지역에 들여보내진 것이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조합이 왜 필요했을까? 단기선교를 둘러싼 이 물음은 한국의 선교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결정적이다.
해외 단기선교가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이 해외 선교 현상과 맞물려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각 교회들이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교회는 선교사가 보내온 소식을 회람하며 자긍심에 빠져들 수 있었다. 세계의 가난한 지역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들은 포교 활동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리스도교 선교가 불가능한 이슬람 지역이 많았고, 전운이 감돌거나 전쟁 중인 곳도 적지 않았다. 대개 중앙정부의 치안 능력이 빈약했고, 종족별 군벌세력이 폭력과 인권침해를 일삼았으며, 이곳에 진출한 서구 자본들에 의한 노동력 착취와 안전사고가 일상화된 곳이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을 설득할 만한 언어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관습과 제도의 장벽을 넘을 만한 인식·수완·정치력이 부족했으며,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나눠줄 물질적 자산도 부족했다. 해서 파송된 많은 이들이 자신을 지원하는 교회에 정례적으로 보고할 만한 성공 사례를 갖지 못했다. 보고서들은 종종 과대포장됐고, 그렇게 해서라도 지원금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생활이 가능했으며, 최소한의 선교 활동도 펼칠 수 있었다.
교회 담임목사 처지에서도 선교사들의 정례 보고는 중요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성장이 멈추었고, 많은 교인이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성장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도는 이들을 유치해 정착시키는 데 더 깊게 연결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들의 사역에 교인을 동참시키는 일은 교인들의 자긍심을 향상시켜 교회에 대한 충성도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그러려면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자주 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선교 보고서들이 과장돼 작성될 수밖에 없었다. 떠돌이 교인들을 유치하는 데도 선교사들의 과대포장된 활약상은 매우 중요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가벼운 지출, 충만한 영혼</font></font>교인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시민사회에서 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됐고,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추문을 언론은 경쟁하듯 폭로해댔다. 교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보수 세력의 부정함과 부패함이 응축된 곳으로 여겨졌다. 이런 문제는 많은 교인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소식을 접한다. 저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저들이 얼마나 복음의 축복이 필요한지….
교인들은 저 가난한 이들과 몸을 섞을 필요가 없다. 그들의 상처 입은 경험과 그로 인한 이상 성격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 가까운 이웃의 가난한 이들에게 수혜를 베푸는 것은 단지 물질적 후원으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저들은 충분히 먼 곳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들은 큰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은 후원으로도 그들에겐 큰 도움이 된다는 선교사의 보고서는, 교인들이 가벼운 물질적 지출만으로도 큰 위안과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다.
요약하면, 해외 선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교회의 성장 위기가 심화되고 교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이 깊은 상처를 받게 되었을 때, 우연히 발견된, 효용성이 아주 큰 대안적 선택이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해외 선교사 수가 급증한 시기가 1989년부터였다는 사실이다. 이 해는, 알다시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내려진 때다. 이런 법제도상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추동했다. 가령, 해외여행은 그 이전까지는 사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졌지만, 이후에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런 인식 변화와 맞물려 교회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전까지는 해외 선교사가 되려는 이는 주로 선교 중심의 파라처치(Parachurch) 출신자였고, 교회는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때는 선교 파라처치와 로컬처치인 교회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 지원자들은 우선 국제 선교단체의 후원을 기대했고, 다음으로는 자기가 속한 파라처치의 후원을 기대했다. 이도저도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은 직장의 해외파견직을 이용해서 ‘자비량 선교’(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는 선교)를 선택하곤 했다.
그런데 해외여행 자유화 조처와 더불어, 해외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맞물려 교회에 선교 후원을 신청하는 이들과 선교사를 독자적으로 파송하려는 교회의 이해가 만나게 된다. 그 결과 해외 선교사 수가 급증했다.
한데 앞서 말했듯이, 해외 선교의 빠른 확산 과정에서 교회와 교인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것이 선교 목적일 뿐 아니라, 자신들의 위기의식에서도 벗어날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여 해외 선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것은, 한국선교연구원(KRIM)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의 자료를 추산해보면 1989∼98년 선교사 수가 매년 400~700명씩 늘어났는데, 1998년부터는 매년 1천~2천 명씩 증가하는 등 1998년을 기점으로 더욱 가파른 증가 추이를 보여줬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가 일어난 직후 잠시 주춤했지만, 이 증가 속도는 2010년 현재까지 변함없다. 그것은 해외 선교 현상이 한국 교회의 위기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구조화됐음을 뜻한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방문자가 선교사로 비약하다</font></font>앞에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의 진원지에서 단기선교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해외 단기선교의 추이 통계를 찾아볼 수 없기에, 이제까지는 본원적인 해외 선교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교회가 해외 선교사를 파견하게 되자 해외 선교와 선교사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자연스레 교인들의 선교지 방문이 잦아졌고, 교회가 그것을 프로그램화하는 일도 생겨났다. 그러면서 발전한 것이 단기선교다.
교인들은 단순한 후원자와 방문자에서 선교사가 되었다. 한데 방문자에서 선교사로 주체가 전화되는 과정은 약간의 도약이 필요하다. 대개의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은 단기선교팀의 활동을 프로그램화할 능력이 없었다. 그럴 만한 이벤트적 기획이나 활동거리도 부족했다. 그것은 더 긴 시간 동안 조직적 경험을 누적한 기관을 필요로 했다. 대형 교회들은 파라처치들이 조직한 기관과 결합해 더 큰 선교 기구를 만들기도 했고, 독자적인 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기관들이 주도해 단기선교 프로그램이 기획·운영됐다. 이 프로그램들은 사전 훈련 과정과 본 선교 과정으로 구성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사후 과정은 거의 기획·시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기선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기선교는 선교지의 필요보다는 선교사로 참여한 이들의 필요와 그들을 파송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수행된 것임을 뜻한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의 해외 선교는 대체로 그런 의미를 가졌지만, 단기선교는 더욱 그런 점이 부각된다. 기간이 짧은 만큼 현지에서 그들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참가자가 선교 기구에 강한 귀속성을 갖게 돼 교회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선교 기관은 참가자의 후속 프로그램을 기획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얻은 경험과 고양된 영성을 오직 자신의 교회에서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선교는 선교라기보다는 교육에 가깝다. 단기선교 프로그램은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 여정이 험난하고 위험할수록 효과는 더욱 상승한다. 일종의 어드벤처 게임이다. 그렇기에 단기선교를 위해 가장 선호된 지역은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는 이런 구조화된 한국 교회의 선교 메커니즘에서 발생한, 충분히 있을 법한 사고였던 것이다.
1970년대 한국 교회에는 ‘기도원 현상’이 붐을 이루었다. 반면 1990년대, 특히 외환위기 이후 한국 교회에는 단기선교 현상이 붐을 이룬다. 과거 교회는 자체 기도원을 두기도 했고, 유명한 기도원과 제휴 관계를 맺기도 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기도원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했고, 때로는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한데 기도원은 현실의 바깥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난폭한 자본주의적 성장주의로 돌진하고 있던 시대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바깥, 비합리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공간, 전통의 노스탤지어가 맹렬히 불꽃을 피우던 공간이다. 이곳에는 사회의 자본주의적 변모 과정에서 실패한 이들이 몰려들었고,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던 이들도 일상에서 후퇴해 이런 비합리의 공간에서 영성을 보충받았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성공한 자들의 신앙적 서사</font></font>1990년대 말, 단기선교 붐은 자본주의적 변화의 성공지대에 선 이들이 그 성공을 만끽하며 영성의 충만함을 체감하도록 한다. 그들의 선교지는 자본주의적 실패의 지대, 그 합리성의 바깥이다. 선교사로 파송된 이들은 그 지역에 자신이 누리는 합리성을 이식하는 것으로 복음화를 상상한다. 그 상상 위에서 그들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더욱 충실한 이가 됨으로써 신앙의 위기를 넘어선다.
그렇기에 단기선교 현상은,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바닥까지 내동댕이치던 바로 그때 급증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공한 자들의 신앙적 승리의 서사다. 바야흐로 오늘 우리 시대 교회의 제도화는 중·상위 계층의 사회적 이해가 신앙적 인식으로 표현됨으로써 실현된다. 요컨대 위기에 직면한 교회는 중·상위 계층의 승리주의를 신앙화해 그 위기를 돌파하고 있다. 그 하나가 해외 선교, 해외 단기선교인 것이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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