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통계청이 실시한 인구센서스에서 한국 개신교는 1995년과 2005년 사이에 -1.6% 성장했다. 같은 기간에 최대 종단인 불교는 3.9% 증가했고, 가톨릭은 무려 74.4%나 증가했다. 한국전쟁 직후를 제외하면 한국 개신교로선 처음 겪는 마이너스 성장의 경험이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오직 성장을 위해 자원을 총동원하는 성장 중심적 신앙제도가 여전했음에도, 그 효과는 참혹하게 드러났다. 이제 성장주의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해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개신교의 전반적 추세는 성찰보다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 모습이다.
이 글은 최근 한국 교회의 성장의 지체 및 감소 현상에 대해 살펴보고, 그 이유를 시대의 거시적 변화, 그 구조적 변동의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개신교도 감소, 멀티신자 등장
먼저 종교인구 통계에 관한 것부터 이야기해보자. 이전 글들에서 언급한 것처럼 1965년부터 1990년 사이에 5년 단위로 개신교회의 교인 증가율이 20~40%나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며 교인 증가율은 2~3%대로 급락했고, 급기야는 1995년 대비 2005년의 개신교 신자 수는 14만여 명이 줄어든 860만여 명이었다.
비록 마이너스 성장의 비율이 낮지만, 마이너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초고속 성장의 기억이 몸에 체현된 한국 교회에는 충격파가 컸다. 교회는, 그 지도자들은 대책을 침착하게 강구하기보다 허둥대며 실수를 연발한다. 혹여 이에 대한 비판이 있기라도 하면, 과민반응하며 더욱 당혹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또한 개신교 신자의 총수가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는 점이 감소를 더욱 심각하게 느끼게 했을 수 있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1천만 신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실상은 860만 명에 불과했다.
교단별 통계를 합하면 개신교 신자 수는 1천만 명을 훨씬 넘는다. 교단 통계는 교회별 교적부를 합산한 것인데, 교적부 합산치와 인구센서스 결과가 그렇게 다른 것은 아마도 교회를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이들로 인한 중복 교적자가 많은 것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이러한 교회 간 수평이동 교인이 많은 것은 교회의 구심력이 약한 탓이겠다. 그것은 신앙에 관한 욕구와 교회가 주는 만족감 사이의 격차감이 크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글 후반부에서 나는 이 격차감을 1990년대라는 시대적 감수성의 변화와 관련시켜 이야기할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인구센서스에서 자신이 개신교도라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불교 사찰과 개신교 교회, 천주교 성당 등을 두루 다니는 이른바 ‘멀티신자’가 부쩍 많아졌다. 그들은 대체로 특정 종단의 신앙제도에 대한 충성도가 낮은 신자들이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신실한 신앙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을 일컬어 개신교 열혈신자들은 ‘사이비 신자’라고 비아냥대지만,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자존성 강한 멀티신자층이 사회에 폭넓게 분포하게 된 것이다. 한데 인구센서스 결과는 필경 그런 이들 중 다수가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고 대답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종교 사이를 넘나드는 멀티신자층이 폭넓어졌다는 것은 다른 종교에 개방적인 불교나 가톨릭에 비해 폐쇄적인 종교관을 주장해온 개신교에는 위기의 징후다. 그리고 멀티신자들 가운데 다수가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을 표상하고 있다는 점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사회적 이미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뒤에서 나는 개신교의 사회적 이미지와 교회의 위기에 관해 좀더 이야기할 것이다.
NCCK의 위기, 한기총의 득세교인 수 감소를 가장 심각하게 체감한 곳은 신학교였다. 고속성장을 구가하던 성장 감각에 맞추어 교단별로 목표치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신학생 수를 증가시켰는데, 졸업한 신학생들의 사역지가 협소해진 것이다. 이것은 경영학의 교회적 버전인 ‘교회성장학’의 수요를 급증시켰고, 좀더 인문적이고 비평적인 현대신학에 대한 심각한 무관심을 초래했다. 하여 신학생들은 현대사회를 보는 안목이 더 협소해졌고, 참여와 책임에 대한 사회적 문제인식에 더욱 무감각해졌다.
교인 수 감소를 격렬하게 체감한 또 다른 장소는 교회, 특히 중소형 교회였다. 실제 감소율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교인들의 교회제도에 대한 충성의 이완 현상은 훨씬 심각하게 다가왔다. 이것은 저조한 교회 출석률로 나타났고, 헌금 감소로 이어졌다. 악화된 재정은 우선적으로 지출을 줄이는 선택을 강제한다. 여기서 가장 먼저 손을 대는 영역은 사회적 부조나 각종 사회단체들에 대한 후원금 같은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교인 참석률을 높이고 새 신자를 유인하는 성장 프로그램에만 몰두하게 된다. 사회 속에 교회는 ‘고립된 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인 수 감소에 민감하게 반응한 영역은 각 교단의 총회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같은 교회 간 연합체들이었다. 1990년대 이후 이 단체들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형 교회들의 영향력이 주로 여기에서 관철되었다는 점이다.
연재의 이전 글들에서 본 것처럼 이제까지 한국 개신교의 교회정치에서 대형 교회들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이 교회들은 자기 교회의 성장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반면에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진보 담론 시장으로 인해, 개별 교회 현장보다 좀더 진보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종교 엘리트가 총회 본부에서 국내외 업무를 주도하곤 했고, 진보적 신학자들의 활동 또한 국내외를 오가며 대단히 활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WCC 자체가 점점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제3세계 교회들이 WCC에서 더 많은 지분을 갖게 되자 나타난 현상이다. 이 지도자들 대부분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것처럼, 각 나라에서 매우 보수적인 신학과 이념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WCC를 매개로 하는 진보신학의 활성화는 옛말이 되었다.
한편 1991년 세계적 종교신학자인 변선환 학장을 보직 해임하고 교수직을 면직시켰으며 목사직을 박탈했고 교적까지 빼앗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감신대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대형 교회가 교단과 교단신학교의 권력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이제 대개의 교단에서 교단정치는 대형 교회의 손아귀에 거의 장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NCCK에 대항해 1989년 한기총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처음부터 대형 교회들이 주도했고, 기부한 금액의 크기에 비례해서 지분을 행사하는 조직운영 방식을 따랐다. 외국의 지원이 끊기자 NCCK도 대형 교회의 기부금 없이는 거의 운영이 마비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신학교의 커리큘럼에 개입해 교회성장학 관련 과목들의 개설을 강화했고, 진보적 신학을 다루는 연구자들의 활동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단 정책에서 더욱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성장주의적인 방식을 강화시켰고, 진보적인 신학 문서들을 사문서화했다. 교회 간 연합체의 활동에서도 반공·친미·권위주의·신자유주의 등의 이념 성향으로 사회를 추동하고, 그렇게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위축된 교세를 숫자만이 아니라 권력으로도 만회하고자 했다.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 교회들이 밀실에서 수행했던 정교 간 밀월관계 대신 기독교 정당을 만들기도 했고, 보수 대연합의 일원으로 정치제도 속의 일원으로 나서기도 했으며, 정권 창출을 위한 정치 과정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누가 왜 교회를 버렸나이제 우리는 개신교 위기의 사회적 배후를 묻고자 한다. 교회를 버린 이들은 누구인가? 어떤 문제의식이 그들의 기억에서 교회를 삭제했는가? 그러한 문제의식이 자라고 있는 사회적 구조 변동의 내용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주지할 것은 교회의 성장이 급격히 둔화되기 시작한 때가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라는 거대한 사회변동의 계기가 일어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는 그 추동 주체로서 ‘시민의 등장’과 얽혀 있다. ‘시민’이란, 군부 권위주의 시대의 ‘국민’에 대비되는 존재다. 국가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는 자의식 속에서 국가가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내면화한 수동적 주체가 국민이라면, 국가와 거래하고 교섭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민주적 제도를 도모하는 주역이 바로 시민이다.
하지만 시민이 낡은 제도의 벽을 뚫고 민주화를 지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여 민주화의 시대는 권위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한 시대다. 그리고 권위주의 시대의 시대감각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던 교회는 바로 이 청산의 주요 표적이었다.
앞의 글들에서 본 것처럼 한국 교회는 미국적 신앙을 동일시 대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상을 미국적 근대화에 대한 상상과 중첩시켰다. 이런 신앙이 한국인의 모던 체험을 대표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의 시대, 반민주에 대한 청산의 시대 한국 교회는 새로운 모던 공간의 상징이 아니라, 퇴색된 모던의 장이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교회는 구태스럽고 시대착오적인 이들로 가득한 공간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미국의 수호신을 섬기는 자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미국을 가슴에서 삭제한 것처럼 미국의 신 또한 삭제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호감과 동경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소비사회로의 급격한 이행기에 부상한 존재는 ‘개인’이다. 자본은 숨겨진 개인의 취향을 개발하라고 속삭이며, 그 취향을 위해 시간을 개성 있게 활용하라고 충동질한다. 사적 욕망들이 분출했고, 그러한 욕망들이 한바탕 놀이를 벌이는 공간인 대중문화가 출현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중문화는 하나의 공포였다. 하여 일부 개신교도들은 그 속에서 작동하는 악마의 코드를 읽어내고자 해석을 시도한다. 그들에게 이른바 ‘뉴에이지’는 대중문화 속에 서식하고 그 현상을 이끌어가는 일종의 유사종교 현상으로 해석되었다. 이에 종교 배타성의 신앙 기조가 작동한다.
이렇게 교회는 소비사회화의 빠른 변화 속에 몸을 내맡기지도 해석하지도 못했다. 교회의 시간은 너무 느렸고, 교회의 ‘성도’는 권위주의 시대의 국민을 너무나 빼닮았다.
하여 시민들과 개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교회에 투사했던 기대를 철회했다. 그리고 교회의 ‘성도’는 낡은 근대의 잔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1990년대 초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신이 추방되기 시작했다.
‘너머를 상상하는 능력’ 잃은 신학
교인들의 증가가 멈춘 시대, 아니 감소하고 있는 시대, 위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뿌리 깊은 구조적 사회변동의 산물이다. 지난 시대 몸에 익은 방식으로 위기는 해소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몸에 익은’ 관행들이 문제다.
이제 교회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한데 ‘새 옷’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또다시 시대에 편승하는 것, 대세를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대세를 비평하는 ‘다른 신앙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어느 길을 선택하든 교회는 현대사회의 변화를 읽어내고 참여와 책임의 가능성을 묻는 신학적 모색을 먼저 해야 한다. 한데 앞에서 보았듯이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도, 참여와 책임에 관한 문제인식도 현저히 퇴화했다. 나아가 대부분의 신학과 교회는 ‘너머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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