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붕괴된 시간, 교회는 대중, 특히 실패한 대중을 외면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한 자들을 위한 종교로 거듭나고 있다(지난 몇 회에 걸쳐 이야기했듯이). 한국 개신교는 점차 중·상위 계층의 신앙적 동우회가 돼가고, 한국 보수주의의 태반(胎盤)이 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시민사회는 종교를 필요로 한다. 특히 실패한 혹은 실패를 예감하는 대중은 다분히 종교화되는 듯하다. ‘종교적 시민’의 대두인데,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글은 이 문제를 다루려 한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교회 공간을 혐오하는 시민들</font></font>
먼저 대표적인 대형 교회인 ‘사랑의교회’의 건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에 대해 얘기해보자. 사랑의교회는 최근 빠르게 성장하는 대형 교회로서,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 선호도 1순위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신축 예정인 예배당이 교회가 구입한 땅의 경계를 넘어 공공도로 지하 공간을 점유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설계하지 않으면 교인 수에 걸맞은 예배당 규모가 될 수 없단다. 교회 부속건물에 속하는 어느 공간이 아니라 바로 예배당이다. 이는 설계 계획을 교회가 변경 없이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교회가 이사를 가지 않는 한, 문제가 된 공공도로의 지하 공간은 영원히 공공적 장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종교단체들을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가 서초구청이 건축 허가를 내준 것에 관한 감사를 청원하려 시민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청원 내용 중에는 사소해 보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하철 출구가 교회당 안쪽으로 나오게 돼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엔 동네길이던 좁은 길이 교회 마당을 가로질러야만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원자들의 말에 따르면, 교회 안을 거쳐야 그 지역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시민의 자유로운 통행에 대한 행복추구권에 침해를 줄 수 있다.
이런 시민의 감정을 뒤로하고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일부 공간을 공공적 시설로 활용하는 일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교회들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폐쇄적 공간 구조를 가졌다. 한데 이 교회의 기획은, 비록 자신의 필요에 따른 것이지만, 신앙의 공공성을 확대하는 데 유의미한 효과를 미칠 수 있다. 나아가 향후에 많은 교회들의 건축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잖은 비기독교인들은, 이 교회의 사례에서 보듯, 교회 시설을 공공적 공간처럼 이용하는 것을 꺼린다. 그냥 계단이고 에스컬레이터이며 길일 뿐인데도 말이다. 교회가 다른 종교의 공간을 우상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사회의 많은 부분을 ‘세상의 것’ ‘무가치한 것’이라고 폄하해온 것처럼, 이제는 많은 비기독교인들도 교회를 그렇게 대하고 있다. 어떤 사소한 얽힘도 싫다는 혐오감의 표현이겠다.
그냥 통과하는 길에 대한 태도가 이렇다면, 교회가 제시하는 ‘길’에 대한 태도는 말할 것도 없겠다. 누누이 이야기했듯이, 개신교 교회는 ‘길’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이들에게 ‘길’이 못 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조사해 지난해에 발표한 ‘2010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개신교는 종교호감도가 천주교·불교·개신교 3대 종단 가운데 단연 꼴찌다. 또 2009년 이 발표한 ‘직업별 신뢰도 조사’에서 조사 대상인 33개 직업군 중 목사는 최하위권인 25위를 차지했고, 천주교 신부(11위)와 불교 승려(18위)보다 훨씬 낮은 신뢰도를 보였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박정희와 조용기 이후의 이후</font></font>그런데 오늘 한국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이다.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말은 지성적 판단에 의지하기보다는 감성적 공조감에 의지해서 품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과 관련 있다. 이때 감성적 공조의 대상은 자신의 지성적 판단을 초월한 존재다. 그것이 이념이든 신이든, 혹은 낯선 대상이든 간에. 곧,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초월적 타자에게 그(들)가 감성적으로 공조하고 의지하려 할 때를 우리는 ‘종교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왜 최근 더 종교적일까? 과거에도 한국은 과하게 종교적인 때가 있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종교성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 자본주의는 한때 온 국민의 꿈이었다. 선진국에 대한 선망과 선진입국에 대한 열망이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발전을 보증해준다고, 아니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이런 꿈이 종교적인지 아닌지는 명료하지 않다. 한편에서 그것은 ‘경제계발5개년계획’ 같은 국가 주도의 발전기획의 산물이며, 그런 경제기획의 국민화 정책에 따라 국민 개개인이 가계경제를 기획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유일한 자원인 사람마저 전쟁의 상흔으로 난도질된 폐허 위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숭배하고 그의 정신에 감정이입함으로써 그 믿음을 통해 기적적인 전대미문의 성공을 이룩한 것이 그 시대 발전의 내막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전자는 지성주의적 해석이고, 후자는 종교적 해석이다. 필시 양 측면이 서로 얽히며 그 시대가 전개됐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경제적 성공은 종교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이 서로 조응하며 이룩됐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시기에 교회도 급성장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구실이 핵심적이다. 사람들, 특히 이농민들은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풍요의 꿈을 꾸었다. 한데 그 꿈을 교회 안에서 이어가도록 이끈 이가 바로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그이가 이런 사람들의 종교심을 최대한 동원함으로써 일종의 교회 성장을 위한 총동원 체제가 가능했고, 그것이 대형 교회를 탄생시키는 핵심적 이유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의 성공주의적 열정은 급격한 사회발전의 종교적 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꿈을 꾸지 못한다. 그것은 (예감된) 몰락의 위기감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과거 꿈의 합리적 근거이던 각종 경제지수들은 더 이상 꿈의 진원지가 아니다. 점차 많아지는 자연재해도 사회적 불면증의 원인이다. 또 멀든 가깝든 발생하는 국제적 위기는 나비효과를 일으켜 종종 대재앙으로 이어진다. 정부의 편향된 정책이나 운영으로 몰락이 조장되는 일도 흔하다(서울 용산 재개발지역의 상인들은 그런 희생자의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언제 어디서 재앙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 자본이나 정부는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실패를 대중에게 전가한다(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뉴타운지구 주민들이 그 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사냥꾼의 정글에 돌아온 신</font></font>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불안해서 한다. 그 일들은 공생해야 할 이웃, 사람이든 생명체든 환경이든, 그 모든 것을 희생시키곤 한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사냥꾼의 세계’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곳이 한국이다. 현대의 사냥꾼은 먹으려고 수렵을 하는 고대의 사냥꾼과는 다르다. 먹어치우든 그냥 폐기하든, 파괴자처럼 행동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사냥꾼이다. 이 사냥꾼들은 자신이 사냥에 실패하는 순간, 다른 존재에 의해 사냥의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산다.
지금은 어떤 계산법도 안전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해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성장해도 다르지 않다. 자기가 사는 곳이 ‘뉴타운 지구’로 선정돼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회사가 큰 이윤을 남겼어도 안전하지 않고, 경영상의 위기가 있으면 더더욱 불안하다. 이런 도피구 없는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이 된다. 지성주의가 주지 못하는 안전을 보장해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감성적 의존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 군부권위주의 시대에 사람들의 종교심을 흡수한 이는 박정희와 조용기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들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었고, 국가와 교회는 그들을 흡수한 핵심적 종교제도였으며, 대중은 이 제도들을 통해 국민으로, 성도로 부름받았다. 여기서 신은 박정희와 조용기를 모상(Image)으로 하여 도래했고, 그런 점에서 이 사회는 신성사회였다(박정희 체제를 비종교적·이성적 전략으로 운위된 체제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박정희의 신성성을 모독하고 국가를 탈신화화하며 등장했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 기획만이 아니었다. 문화적·종교적 영역도 민주화의 대상이었고, 신성국가 통치자의 신민인 국민은 민주국가의 주권자인 시민이 되었고, 성도의 주권의식도 향상됐다. 그렇게 민주화는 사회에서 신성을 퇴거시켰다.
그리고 포스트 민주화 시대, 사람들이 더 이상 민주주의의 지성주의적 기획을 신뢰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는 도래했고, 그 예측 불가한 사회는 구석구석 정글로 변모됐다. 모든 사람들은 정글의 사냥꾼이 되었고, 심지어 자신조차 사냥감으로 삼는 무차별적 사냥기계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종교적 시민으로 탄생했다. 그리고 신(들)이 다시 귀환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지배자(혹은 지배체제)에게 그 신은 곧 자본이었다. 대형 교회의 신도 자본과 점점 동일한 존재처럼 되고 있다. 한데 이 신은 불안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불안을 조장한다. 그리고 승자만 독식하도록 베푸는 축복의 신이다. 하여 불안해하는 대중은 그 신에게 감성적으로 의지할 수 없다.
대중에게는 다른 신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종교적이지만, 종교심을 흡수할 신앙제도로 개신교는 선택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 친화적인 개신교의 신은 실패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종교적 시민을 향해 귀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에 종교적 시민으로 등장한 대중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들에게 귀환한 신은 어떤 존재인가?
이 칼럼 연재의 처음 부분에서 나는 대중의 종교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촛불시위를 얘기했다. 그것을 일종의 대중적 종교 의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2002 월드컵에서 보았듯이, 축구 같은 국가대항 스포츠도 종교적 의례를 통해 대중의 열망을 흡수한다. 운동선수나 배우, 연예인 등 대중스타도 종교문화적 의례를 연출해내곤 한다. 신의 귀환, 아니 신들의 귀환은 이런 형식으로 불안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안을 선사하고 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 성찰성 없는 위험한 열정</font></font>그런데 이 종교적 의례들은 순간적이다. 좀처럼 기억이 누적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찰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뜻이다. 집합적인 감정적 분출을 통해 참여자들에게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의례들은 그런 점에서 종교적 효과가 넘치는데, 종교적 성찰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례들은 파괴적인 공격성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감성적 열정이 넘치지만, 성찰이 결핍된 종교는 위험하다.
아주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의례를 통해 수행되는 종교적 체험도 있다. 어떤 명상이나 음악은 그런 효과를 가진다. 한데 여기에는 종교적 체험이 너무 개별화된다. 종교를 통해 감성적 경험을 교류하고 성찰을 나누는 기능이 결여돼 있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 시민들의 갈망에 따라 신들의 귀환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성찰의 종교성, 집단적 경험과 기억 나눔의 종교성을 특별히 필요로 한다. 대형 교회는 그런 점에서 시민적 종교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퇴행적이며 권력지향적이고 반성찰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종교적 사회에서 대안적인 종교제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 연재의 결론은 그 가능성을 한국 개신교에도 물을 수 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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