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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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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암환자에 대한 가난한 대책

걸음마 수준인 정부의 암 발생·사망 불평등 대책…

실태 공개 않고 기존 제도마저 축소 적용하려는 움직임에 신음하는 환자들
등록 2010-12-22 15:25 수정 2020-05-03 04:26

지난 2000년 영국 정부는 ‘국민건강보험(NHS) 암계획’이라는 흥미로운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도입부에 ‘암계획’의 네 가지 목표를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비숙련 노동자가 전문직 노동자보다 암으로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보고서는 그 배경으로 영국의 비숙련 노동자의 10만 명당 폐암 사망률(82명)이 전문직(17명)보다 높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영국 정부는 흡연과 식생활, 암 증상에 대한 낮은 인식 등을 원인으로 들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목표도 분명하게 정했다. 육체노동자의 평균 흡연율을 1998년 32%에서 2010년 26%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또 낙후한 지역을 포함해 전국 모든 지역에서 여성 자궁경부암 조기 검진 비율이 2002년 80%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비공개된 ‘암 사망 불평등 보고서’

서울 월곡동 성가복지병원에서 한 환자의 등 뒤로 십자가와 성가족상이 서 있다. 성가복지병원의 호스피스는 ‘성가소비녀회’라는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다. 국가의 호스피스 정책이 아직 부실하다 보니, 호스피스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기관에서 운영하고 있다.한겨레21 정용일

서울 월곡동 성가복지병원에서 한 환자의 등 뒤로 십자가와 성가족상이 서 있다. 성가복지병원의 호스피스는 ‘성가소비녀회’라는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다. 국가의 호스피스 정책이 아직 부실하다 보니, 호스피스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기관에서 운영하고 있다.한겨레21 정용일

2005년 5월에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암에 관한 권고안을 채택했다. WHO는 권고안에서 지구에서 해마다 1천만 명이 암에 걸리고, 그 가운데 65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여기에도 암 불평등에 대한 권고 내용이 포함됐다. WHO는 회원국에 대한 요구사항에서 “경부암·구강암 등 저소득층에서 발생률이 높고 정책적으로 개입할 때 비용 효과가 높은 암을 우선순위에 두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우리나라에서 암 발생·사망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안타깝게도 영국에는 최소한 10년 이상 뒤져 있다. 암 불평등 관련 정책이 아예 없는 까닭이다. 우선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 의제에 암 발생·사망의 불평등 문제가 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암 정책과 관련해 가장 포괄적인 뼈대에 해당되는 것이 10년에 한 번씩 수립하는 ‘암 정복 10개년 계획’이다. 영국 정부의 ‘암계획’쯤 되는 정책 보고서다. 2006년에 작성한 ‘암 정복 10개년 계획’에는 건강 형평성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인식한 정황은 있다. 노무현 정권 당시 보건복지부는 암 발생과 사망의 불평등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용역을 줬다. 손미아 강원대 교수 등 16명의 연구진이 참석한 규모 있는 프로젝트였다. 그 보고서가 2008년 11월에 완성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기록이 남아 있는 국민 3259만 명의 기록을 모아 암 발생과 사망의 계층별 불평등 양상을 분석한 328쪽짜리 보고서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에 그 이유를 물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아직 전체 연구가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발표에는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승식 인하대 교수(예방의학)는 “정부 차원에서 암 불평등 문제에 접근하려면 우선 전 국민의 암 발생 비율과 양상에 대한 정확한 연구를 한 뒤 이를 기준으로 구체적인 정책 목표를 정하고 집행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황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정부는 암 발생·사망 불평등 문제에 대한 첫발을 겨우 뗐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지 않고 어정쩡한 자세로 2년째 서 있는 셈이다.

명시적으로 암 사망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은 아니지만, 유사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정책들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암환자 본인부담금 산정 특례제도’다. 이는 암환자가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하면 5년 동안 진료를 받을 경우 치료비의 10%만 부담하도록 하는 제도다. 더욱이 지난해 12월부터는 본인부담 비율이 5%로 낮춰졌다. 암에 한 번 걸리면 ‘집안 기둥이 뽑히는’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책이었다. 일반 환자의 본인부담률이 입원은 20%, 외래는 30~60% 수준인 점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제도였다.

지난 8월에 나온 보건복지부의 자료를 보면 성과도 상당했다. 다른 일반 환자와 같은 조건에서 치료비를 냈을 때와 견줘 암환자들이 혜택을 받은 진료비는 지난해 6151억원이었다. 정부는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암환자들의 진료비 부담을 총 2조417억원 덜어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암환자 건강보험 보장률도 2004년 49.5%에서 2008년 69.8%까지 크게 올랐다.

검진의 사각지대, 노인·실업자·빈민

하지만 이 제도도 지난 9월부터 혜택 범위를 두고 잡음이 일고 있다. 정부가 지난 9월부터 일부 암 병력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산정 특례 지원을 종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5년 9월 제도를 시행하면서 특례제도의 혜택 기간이 5년을 넘기고 암이 완치된 환자에 대해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상이 제주대 교수(의료관리학)는 “한 번 암에 걸린 환자는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재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양전자단층촬영(PET) 같은 검사에 대한 혜택마저 일괄적으로 끝내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적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꼭 필요한 암환자들에게 건강보험 재정이 투입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가 진행하고 있는 저소득층 무료 암 검진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정부는 1999년부터 빈곤층을 대상으로 암 검진 사업을 무료로 벌였다. 대상은 의료급여 대상자와 건강보험 가입자 하위 50%까지 확장됐다. 조사 항목도 위·간·대장·유방·자궁경부암 등 5대암을 포함한다. 지난해 정부는 올해 국민 암 조기 검진 비율 60%를 목표로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조기 검진으로 대장암을 고친 탤런트 김승환씨를 홍보대사로 삼아 홍보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국민 암 조기 검진 비율은 40%에 못 미친다. 게다가 무료로 암 조기 검진을 받을 수 있는 빈곤층의 검진 비율이 중·상위 계층보다 오히려 더 낮았다. 자료에서는 지난해 의료급여 대상자의 암 검진 수검률이 27.6%로, 건강보험 가입자의 조기 검진 비율 35.4%보다도 훨씬 낮았다. 무료로 검진받을 수 있는 의료급여 대상자 4명 가운데 3명은 제도의 혜택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상이 교수는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는 인구는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암을 미리 발견하지만, 노인이나 실업자, 빈민 등이 검진을 받는 비율이 낮아 암 사망 불평등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완화의료 분야, 이른바 호스피스 분야는 국가 암 정책 가운데서도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2006년 4월에 발표한 ‘암 정복 10개년 계획’ 자료를 보면, 올해까지 호스피스 병상을 1천개를 확보하고 2만 명의 환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에 확인해보니, 12월 현재 병상 수는 653개에 불과했다. 또 지난해 호스피스 이용 환자 수는 5600여 명으로 전체 암 사망 환자의 8.6%였다. 미국 말기암 환자의 호스피스 사용 비율은 38.8%였다. 또 호스피스 병동의 건강보험 수가를 두고도 병원들과 보건복지부의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정부가 올해 완화의료 분야에 책정한 예산은 18억3천만원이었다. 이 예산은 호스피스 운영 시설 지원비로 대부분 집행됐다.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말기암 환자들

윤영호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호스피스에서는 의료진뿐 아니라 성직자와 사회복지사들이 함께 협업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든다. 대부분의 호스피스 기관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완화의료 분야에 대한 관심이 적다 보니 이 분야가 정책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려나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정부의 암 정책이 지난 10년 동안 예방과 조기 진단에 집중된 측면이 있다. 완화의료 분야는 양적 팽창에 집중하기보다 접근권을 개선하는 등 질적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1996년 ‘1기 암 정복 10개년 계획’을 내놓았다. 그 뒤 본격적인 암 정책이 시작된 지 15년이 흘렀다. 조기진단과 치료, 완화의료 전반에 걸친 부분적인 성과에도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특히 빈곤층은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다. 영국 정부나 (WHO)의 시야에는 보이는 빈곤층이 한국에 오면 보이지 않는 탓이 크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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