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 가면 되도록 말을 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패싱’(Passing)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대만 사람으로 간주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편의점에서 물건을 골라 점원에게 내민다. 점원이 중국어로 무언가 말해도 대충 ‘생까고’ 계산대만 쳐다본다. 찍힌 숫자를 보고 돈을 내민다. “하우 머치?” 괜히 어쭙잖은 영어라도 한마디 했다가 피차 귀찮아지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외국인이라 괜스레 사기당할 위험은 없잖아, 하면서 소심한 패싱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적당히 패싱하면 호기심 어린 불편한 혹은 귀찮은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된다.
패싱, 유리 벽장, 아우팅
패싱은 원래 (백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흑인들이 백인인 척하는 것을 뜻했다. 미국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굳이 흑인이라 말하지 않으면 백인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생겼다. 이런 상황을 활용해 흑인의 출입이 통제된 버스도 타고 클럽도 가고 하면서 차별을 피한 이들이 있었다. 다만 자신감은 필참. 호텔 투숙객이 아니면서 호텔 수영장을 이용할 때, 당당하게 로비를 통과해야 의심을 받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에서 카자흐스탄인 보랏에게 어떤 백인이 “수염을 깎고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녀라”고 충고한다. 카자흐스탄을 중동으로 오해하는 백인은 ‘알카에다 시대’에 차별당하지 않을 정체성으로 패싱하라고 지도하는 것이다. 일부 새터민들은 덜 무시당하기 위해 중국동포로 패싱한다. 아, 유흥업소 들어가려고 청소년도 패싱한다. 커밍아웃하지 않으면 이성애자로 간주되는 동성애자도 의도하지 않은 패싱을 몸에 익힌다.
반면에 유리 벽장도 있다. 지겹지만 복습하면, 커밍아웃은 벽장에서 나오기(Coming Out Of Closet)의 줄임말이다. 자기만의 벽장에서 나와 세상에 성정체성을 드러낸단 뜻이다. 비교적 신종 개념으로 ‘유리 벽장’(Glass Closet)이 있다. 남들은 그가 동성애자인 것을 알지만, 심지어 애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파파라치 카메라에 잡혀 세상에 퍼졌지만, 여전히 ‘대놓고’ 커밍아웃하지 않는 유명인들이 있다. <cnn> 간판 진행자 앤더슨 쿠퍼는 유리 벽장 안에 있는 대표적 인물이고, 여배우 조디 포스터는 거기에 있었던 유명한 사람이다. 동성애자로 (사생활에서)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남들이 애써 이룬 인권의 성취에 무임승차하는 놈이란 고전적 비판도 있고, 정체성의 금긋기를 희롱하는 자유인이라는 포스트모던한 평가도 있다.
아우팅이란 전술도 있다. 1980년대 일부의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유명인 가운데 커밍아웃하지 않는 이들을 골라서 ‘패는’ 방법을 썼다. 밤새 뉴욕의 담벼락에 조디 포스터 사진을 붙이고 거기에 ‘게이’라고 써서 아우팅시켜버리는 급진적 운동이다. 유명인이 커밍아웃하면 세상의 인식이 바뀌고, 역할모델이 되는 유명인에겐 그럴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동성애자를 사형까지 시키는 법안을 만들려고 해 세계를 경악시켰던 우간다에서 죽음의 아우팅이 벌어졌다. 이름도 말하기 싫은 신문이 동성애자의 사진, 이름, 주소를 싣고 “그들을 목매달아라”고 했단다.
북한을 넘어가는 질문
북한의 세습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라고 선택된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양심의 자유인가, 공당의 직무유기인가. 다르게 말해서, 그것은 패싱할 자유인가, 현명한 전략인가. 여기도 유리 벽장이 있는가. 나아가 입장을 묻는 것은 아우팅시키는 짓인가. 미국도 아니고 우간다도 아닌 한국은 어디인가. 그것은 세습과 MB를 넘어서 한국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뻗어가는 질문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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