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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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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비린내 맡으며 가족사를 추억하다

[입만 살아가지고] 도전, 양배추김치 ①
등록 2010-10-13 10:44 수정 2020-05-03 04:26
양배추김치

양배추김치

1979년에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그룹 ‘아바’가 마지막 히트곡 와 으로 종일 라디오에 등장했고, 아버지는 섬의 허름한 극장에서 신성일이 나온 을 봤을 테지만 취향상 이나 는 보지 않았을 것이며, 어머니는 세 살이 된 나를 업고 ‘YH 사건’(YH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다 강제 진압된 사건) 뉴스를 보기보다 아마 마이클 잭슨의 를 보며 심심함을 달랬을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해 처음 양배추김치를 담그셨다.

양배추김치는 내 가족사의 일부였다. 그런데, 대체 그걸 왜?

“그때는 양배추가 엄청나게 쌌거든. 배추보다 훨씬 싸서 너 세 살 때 한 번 담가봤는데, 우리 식구들은 잘 안 먹어서 나중엔 항상 버렸지. 이상하게 우리 식구들은 잘 안 먹었어. 양배추김치가 처음 담글 때는 사각사각한데, 조금만 익으면 완전히 축 늘어져서 배추김치처럼 익을수록 아삭거리는 맛이 안 나. 그런데 또 어머니 친구는 건강식이라고 가끔 담가먹데?”

“극단적인 맛이구나예~.”

전화를 끊고 미리 인쇄한 조리법을 다시 훑어봤다. 맛을, 상상할 수 없었다. 스타블로거 문성실씨의 양배추김치 조리법을 참조했다. 며칠 전 시장에서 6천원을 주고 사온 양배추를 4분의 1만큼 잘랐다. 한국물가협회 도매가 정보를 보면, 배추 10kg이 2만5천원이고 양배추 10kg은 2만4500원이니 가격은 거의 같았다. 조리법대로 물 1컵에 밥숫가락 두 개 정도 분량의 소금을 녹여 양배추를 절였다. 1시간 동안 숨을 죽여야 했다. 1시간 뒤 숨 죽인 양배추를 물에 헹궜다. 양배추와 대파를 씻느라 이미 손가락 끝마디는 물에 불어 우둘투둘해졌지만, 여전히 맛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이걸 먹는단 말인가.

멸치액젓을 붓고 본격적으로 손을 놀렸다. 조물조물, 멸치액젓의 미끈미끈한 질감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양배추는 여전히 뻣뻣했다. 그러나 서서히 지난해 남해의 멸치잡이배에서 맡았던 멸치 비린내가 피어올랐다. 물론, 큼직하게 썬 양배추와 멸치액젓의 식감과 맛이, 잘게 썬 양배추와 드레싱처럼 어울릴지는 여전히 자신 없었다. 뚜껑을 덮고 나서도 오른손에서 계속 멸치액젓 냄새가 진동했다. 키보드에 냄새가 밸 것 같다.

어머니가 최초로 양배추김치를 담그셨던 1979년,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가난한 청년이 아니라 인천제철 대표이사였다. 그가 그때도 양배추김치를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배추가 비싸니 내 식탁에는 배추 대신 양배추김치를 올리라”는 이 대통령 발언의 정확한 의도도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한 칼럼니스트의 추측처럼 이 대통령이 가난했던 시절 먹던 양배추김치를 떠올리고 그런 지시를 한 것 아니냐는 가능성도, 키보드에 묻은 멸치액젓 냄새만큼은 존재하는 것 같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아직 몇천달러이던 시절, 가난한 공무원의 아내도 양배추김치를 담갔다니 말이다.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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