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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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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라는 ‘종족’은 태어나는가


희대의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를 옆에서 관찰한 앤 룰의 <내 옆의 이방인>
등록 2009-12-24 15:35 수정 2020-05-03 04:25

수십 명의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원래는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어떤 계기로 변해서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지르게 된 걸까. 아니면 날 때부터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존재일까.
양쪽의 견해는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개 자기만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영화 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한니발 렉터 박사, 사상 최악의 살인마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냉정한 살인마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그도 어린 시절에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여동생의 참혹한 죽음이 인육을 먹는 그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는 단서는 될 수 있다.

친절하고 똑똑하고 잘생긴 청년

〈내 옆의 이방인〉

〈내 옆의 이방인〉

실제 현장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조금 다르다. 2005년 2월8일치 에 실린 ‘최악의 사람들은 ‘악마’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For the worst of us, the diagnosis may be ‘evil’)라는 기사에서 필자는 연쇄살인범들을 다뤄본 많은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이 악한 천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과연 어느 쪽의 말이 맞는 것일까. 싸움에서 이기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 연쇄살인범이 사회가 극복해야 할 존재라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해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으로 (The stranger beside me)의 저자 앤 룰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 중 한 명인 테드 번디와 흉금을 터놓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번디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던 때 시작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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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앤 룰의 인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직 경찰인 그녀는 읽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경찰 관련 잡지에 범죄 사건에 관한 글을 기고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부부는 오랜 갈등 끝에 이혼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바로 그때 앤 룰의 남편은 피부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얼마 전 하버드 의대에 다니던 동생의 자살이라는 고통을 겪은 그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릴 겸 그녀는 봉사활동을 하기로 하고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전화할 수 있는, ‘생명의 전화’와 유사한 단체인 크라이시스 클리닉에서 자원봉사자로 일을 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워싱턴주립대 심리학과에 다니는 한 학생을 만나게 된다. 친절하고 똑똑하고 장래에 거칠 것 없어 보이는 잘생긴 청년, 그의 이름은 테드 번디였다.

크라이시스 클리닉에서 자원봉사자가 주로 하는 일은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 전화를 해오면 시간을 끌면서 구급대원들이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지루한 대기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앤 룰과 번디는 금세 가까운 친구가 된다. 앤 룰은 번디보다 나이가 15살이 많고, 책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그에게 애정을 갖지는 않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번디에게 이성으로서 끌렸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둘은 급속도로 절친해진다.

앤 룰은 번디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혼하려는 결심은 굳혔지만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남편을 떠나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고 했다. 번디는 그녀의 얘기를 귀기울여 들은 다음 남편과 이혼하라고 충고한다. 두 사람이 이미 헤어지기로 했으면 남편도 남은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앤 룰은 그의 충고를 따라 남편과 이혼하고 남편은 그 뒤 4년간 행복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소중한 충고를 해준 번디에게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즈음 크라이시스 클리닉이 있는 시애틀에서 젊은 여성들이 실종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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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열연한 ‘한니발 렉터’(왼쪽)는 치밀하고 잔인한 연쇄살인범의 전형을 보여줬다. 한겨레 자료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열연한 ‘한니발 렉터’(왼쪽)는 치밀하고 잔인한 연쇄살인범의 전형을 보여줬다. 한겨레 자료

첫사랑의 충격이 살인 충동을 일으켰을까

번디의 출생은 예사롭지 않다. 1946년 그의 어머니 루이스는 혼전 임신을 한다. 아이 아버지는 루이스를 버렸고 혼자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루이스는 집에서 먼 고장에 가서 몰래 번디를 낳아 온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사생아를 낳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을 의미했다. 루이스의 아버지, 즉 번디의 외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번디가 자신의 아이라고 말한다. 번디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를 누나라고 부르면서 자라게 된 것이다.

몇 년 뒤 결혼한 어머니를 따라 계부와 함께 살게 된 번디는 평생 번듯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에 대한 선망과 열등감을 지니고 살게 된다. 명석한 두뇌에 노력을 더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스테파니란 이름의 그녀는 날씬한 몸매에 앞가르마를 탄, 긴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번디와 즐거운 한 시절을 보낸 스테파니는,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를 떠난다. 그녀에게 번디는 단순한 학창 시절의 연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절망에 빠진 번디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로스쿨에 들어가고, 주지사와 친분을 맺어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한 다음 다시 스테파니를 찾아가 청혼을 한다. 다시 나타난 그에게 감동한 스테파니가 청혼을 받아들이자 번디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버린다. 그가 원한 것은 복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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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디에게 살해된 여성은 대부분 놀라울 정도로 스테파니를 닮았다. 날씬한 몸매에 갈색의 긴 머리, 그리고 앞가르마. 책에는 희생자 몇 명의 사진이 나오는데 하나같이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미인이다. 그리고 스테파니와 자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비슷하다.

두 번의 탈주, ‘최후’를 자초하다

여기까지 들으면 테드 번디의 이야기도 어딘지 이해가 가는 것처럼 보인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가 첫사랑으로부터 실연을 당하자 그 충격으로 결국 연쇄살인범의 길에 빠지게 되는 사연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번디의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는 스테파니를 만나기 훨씬 전 어린 시절부터 살인을 저질러왔던 것이다. 앤 룰이 추측하기로는 번디의 살인 행각은 그가 16살 때 처음 시작됐다.

번디가 범행을 할 때 잘 쓰는 수법이 있다. 다리에 깁스를 한 채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젊은 여성에게 접근한다. 잘생기고 착해 보이는 남자가 목발 때문에 가방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여자들은 자진해서 그를 돕는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 가방을 들어주는 것이다. 일단 차에 도착하면 그는 돌변해서 흉기로 피해자를 때려 기절시킨다. 한적한 곳까지 피해자를 끌고 간 다음 잔인하게 성폭행을 하고 무참하게 살해한다. 그가 그런 식으로 죽인 피해자가 몇 명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경찰에서는 적어도 30명 이상의 젊은 여성을 죽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번디는 “그보다 한 자리 숫자는 더해야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범죄 에너지는 놀라울 정도다. 한번은 하루에 두 명의 여성을 차례로 납치해서 살해한 일도 있다. 그가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된 것도 범죄 충동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애틀에서 연쇄살인을 하던 번디는 유타주에 있는 로스쿨에 다니며 그곳에서 범행을 계속한다. 그러던 중 캐럴 다론치라는 여성을 납치하려다 실패하고 경찰에 체포된다. 구금돼 재판을 받던 번디는 탈옥에 성공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잡히지만 놀랍게도 다시 한번 탈옥에 성공해서 플로리다주로 도주한다.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을 저지른 강호순씨가 지난 2월2일 안산 부곡동 야산에서 이뤄진 현장검증에서 피해자의 주검을 유기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을 저지른 강호순씨가 지난 2월2일 안산 부곡동 야산에서 이뤄진 현장검증에서 피해자의 주검을 유기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1970년대의 통신과 정보망을 고려할 때 그가 플로리다에서 조용히 지냈으면 아마도 체포되지 않고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대학교 기숙사에 침입해서 여러 명의 여학생을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폭행하고 살해한다. 최후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 번의 탈옥 뒤 마지막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재판을 받으면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범행을 부인한다. 사형선고를 받고도 집행이 번번이 연기되면서 수년간 수감돼 있던 번디는 예정된 사형 집행 직전에 18명을 죽였다고 자백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그때 자백을 한 것은 사형 집행을 연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여자들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인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사형 집행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한 심리학자가 번디를 찾아온다. 평소 포르노가 모든 악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해온 그 학자는 번디에게 어린 시절에 포르노를 많이 보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번디는 포르노를 많이 봤고 그것 때문에 범죄의 충동을 느꼈다고 대답한다. 희대의 살인마 번디의 고백은 언론에 크게 보도됐고 그 학자의 책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그러나 번디는 포르노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는 그 상황에서도 세상을 우롱했던 것이다. 마지막 형장에 들어설 때까지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처형만이 능사일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도리스 레싱의 소설 에는 선천적으로 악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종족’에 속한 아이가 등장한다.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부모가 아이를 수용시설에 보냈다가 죄책감으로 다시 찾아오지만, 결국 나머지 가족들의 삶마저 나락에 빠진다. 레싱은 이 책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우리와는 다른 존재가 분명히 있다는 강한 암시를 한다. 만일 그런 종족이 있다면 테드 번디는 분명 그중에 속할 것이다.

번디와 같은 연쇄살인범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사회는 지금까지 이런 존재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번디도 사형을 당했고,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번디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형 집행 전날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번디는 “내 안에는 엄마가 기억하는 나도 있어”라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 말이 진실일까. 죽어 마땅해 보이는 연쇄살인범의 내면에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것일까. 마지막까지 세상을 우롱한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여기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면서, 연쇄살인범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면서 처형만을 반복해온 우리는 정말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일까.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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