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30일,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 31일부터 이틀간 종일 경기 성남시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있었다. 작달비가 내리고서, 장지 가는 이튿날은 몹시 추웠다. 그래 떠는 것인지, 슬퍼 떠는 것인지 남은 자들은 헷갈려했다. 11월 첫날이었다.
그주 초 나는 나흘간 여행을 다녀왔다. 10월26일 늦은 밤, 때 묻은 배낭을 메고 귀가하는 내게 어머니는 “큰어머니가 많이 안 좋으시다. 날 보자고 해 다녀왔다”고 일러주셨다.
여장을 풀지도 않은 채, 죽음은 참 가깝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허무와 낙망 따위를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듯 정처를 둘 수 없는 곳,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서 나흘을 보내다 왔다”고 그날치 블로그에 적으며, 이리저리 살 궁리를 하는 ‘나’와 참 허무하게 교차했다.
그러곤 이내 몽총한 생각이 들었다. ‘평일에 돌아가시면 안 되는데….’ 월요일까지 쉬었는데, 이미 예정한 기사 취재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큰어머니는 정말로 주말에 문상을 받으셨다. 이삼십대 나이가 꽉 찬 조카들은 큰어머니의 입관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제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모시겠다”는 상조회사 직원은 염을 하며 쉴 새 없이 땀을 흘렸다.
물푸레나무 속처럼 하얗게 침묵하는 육신은 살아 계실 제 내게 결혼을 보채던, 효도하라고 말하던,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타박하던 어느 날의 추억을 끊임없이 불렀다. 눈물이 계속 맺혔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쳐다볼 수 없었다.
절차가 끝난 뒤 조카들은 빈소로 와 애인·자동차·회사·결혼 따위 얘기로 오랜 안부를 주고받았다. 때때로 커지는 육성은, 문상객들의 떠들썩한 화투판에 고분고분 묻혔다. 상조회사는 익숙지 않은 여러 절차를 복원하며 떠난 이를 부지런히 불렀다, 아니 남은 자를 불렀다. 그때마다 곡이 있었다. 장례를 관장하던 이들의 상의에 박힌 지나치게 큰 회사 로고가 불편했으나, 아버지도 작은아버지들도 그가 준 명함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큰어머니는 화장을 했다. 그리고 시가 운영하는 납골당에 모셔졌다. 손이 닿지 않는 위치의 납골당은 저렴하고, 눈높이의 위치가 가장 비싸다고들 한다. 하지만 시가 운영하기에 균일가로 위치 추첨을 한다. 상주는 딱 어깨 높이의 납골당 ‘5층’을 낙점받았다. 친척들은 모두 웃으며 반겼다.
그럴 것이다. 죽음은 떠난 이만의 것이 아니다. 불가해한 죽음을 산 자들이 털어내며 제 삶을 확보해가려는 가장 명징한 몸짓인 것을 모르지 않는다.
운구차가 병원을 떠나려 할 때, 새 죽음이 병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례 끝 부모님을 태운 채 집으로 오는 길, 내일 써야 할 기삿거리가 없는데 어쩌나, 애를 태웠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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