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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등록 2009-11-04 11:15 수정 2020-05-03 04:25
핑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핑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새벽에 술에 취해서, 외간 남자 차 타고 돌아와서는 집 앞에서 빠이빠이~ 하는 마누라를 보면 PD님은 눈 안 뒤집히겠습니까?” 열변을 토하는 폭력 남편의 핑계는 짐짓 그럴싸했다. 남편이 몇 년째 백수에다가 술 퍼먹는 재주만 길러온 터라 아내가 식당일로 근근이 일상을 꾸리고 있으며, 외간 남자의 차를 타고 귀가한 것이란 실상 회식날 식당 사장이 아줌마들을 일일이 태워주었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적장애인에게 소처럼 일을 시키면서 월급은커녕 그의 수급비까지 챙기고 있던 주인은 “가족이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다. 고용인이 아니라 가족이니, 그 수급비도 가족이 함께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부려온 사람에게 먹여온 개밥만도 못한 식사와, 썩는 냄새 등천하는 숙소 앞에서 그 핑계는 처참하게 낯을 잃었다.

식상함? 고비용?

핑계란 것이 그렇다. 핑계를 대는 사람 딴에는 누구나 믿어줄 것 같지만 한 발짝만 객관적인 입장에 서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바보스러운 건지 뻔뻔한 건지, 주근깨투성이 얼굴과 뻐드렁니가 유리 가면 속으로 선연히 드러나는데도 ‘영구 없다’를 부르짖는 ‘영구’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더하여 당혹스러운 것은 이 정 떨어지는 영구 흉내가 폭력 남편 등 저급한 인사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의 김제동씨가 긴급하게 MC 자리를 내놓아야 한 데 대한 핑계로 ‘식상함’이 등장했다. 녹화를 며칠 앞두고 해임 통보를 할 만큼 급박한 사유였는지는 도통 알 길이 없고 여당 의원들조차 그 핑계에 의아해했으나, “MC 4년이면 오래 했다”는 설명은 일견 그럴듯했다. 그러나 국정감사 때 나온 “진보·보수 논란을 제공한 진행자를 배제하는 것이 제작자 입장에선 당연한 것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심으로써 그만 가면 속 뻐드렁니가 드러나고 말았다.

손석희씨의 하차에 대한 핑계로 널리 운위되었던 것은 놀랍게도 ‘고(高)비용’이었다. 충심으로 말하건대 최소한 그보다는 훨씬 더 우아한 핑계를 마련했어야 옳았다. 잘나가는 예능 MC의 회당 출연료가 얼마인지를 삼척동자도 아는 판에,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토론 프로그램을 7년간 진행해왔고 젊은이들에게 언론인의 롤 모델로 즐겨 선정되던 이를 물러앉혀야 하는 핑계로서 ‘고비용’이란 2% 아닌 98%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지적장애인에게 개밥을 먹이고 쓰레기집에 재우면서도 가족처럼 지냈다고 우기는 이들의 핑계 수준은 넘어서는, 이치에 맞는 명분이라도 제시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닌” 시절부터 “탁 치니 억” 하고 사람이 죽었다는 해외 토픽을 거쳐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해서” 부동산을 사들였다는 연애담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람들은 정말로 ‘말 같지도 않은’ 핑계의 홍수 속에 살아왔다. 거기에 ‘식상하고 고비용’이라는 핑계 이하의 핑계로 프로그램을 훌륭히 이끌어온 방송인들의 자리가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광경을 보태게 되었다. 정황이야 어쨌든 그들의 교체에는 절대로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고 정색하는 분께는 이따금 촬영 현장에서 흥얼거리는 노래 한 자락을 들려드리고 싶다. “내게 그런 핑계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네가 만약 나라면 넌 믿을 수 있니.”

김형민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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