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캐럴 오츠의 〈강간, 사랑 이야기〉
가정폭력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남들 앞에서는 자상해 보이기만 하는 남편이 아내와 둘만 있을 때 돌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면 단순한 폭행을 넘어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때도 많다고 한다. 폭행이 일상화되면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를 하거나 주위에 알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폭력에 시달리다 못한 아내가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하는 사건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어떤 경우에는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법원이 지금까지 견디기 어려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살해한 아내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한 사례는 몇 건이나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 건도 없다.
남편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별거 중인 아내가 몰래 자기를 미행해서 주소를 알아낸 다음 찾아와 목에 가위를 들이대고 성교를 요구하는 남편을 살해한 사건에서 서울고등법원은 2001년 2월 “피해자(남편)가 어릴 때에는 매우 유순하였고… 어린 두 자녀를 만나지 못하여 가슴 아파하고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다정한 아버지, 그리고 피고인(아내)과의 헤어짐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재결합을 간절히 원하고 그러면서도 피고인을 크게 원망하지 아니하는 마음 여린 남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다만… 경제적 무능력에 대한 열등의식과 피고인의 직장생활과 관련한 약간의 의처증으로 말미암아 피고인에 대하여… 거칠고 극단적인 표현을 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아내에게 징역형을 선고한다. 재판부는 ‘증거에 의하면’ 이 사건 이전에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면서 칼을 사용한 것은 한 번뿐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술만 마시면 아무런 근거 없이 남자관계를 의심하면서 폭행을 반복하는 남편에게 수십 년간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다리가 골절되거나 양쪽 고막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은 적도 있던 62살의 아내가, 또다시 술에 취해 스카프로 목을 조르려는 남편의 손에서 스카프를 빼앗아 살해한 사건에서 대구지방법원은 2008년 10월 “아래층에 살고 있던 이웃집으로 피하는 등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가) 공포, 경악, 흥분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판단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라고 하면서 유죄를 선고한다.
법의 역사를 보면 인종적·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유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계층이나 집단도 여성만큼 끝없이 법으로부터 외면당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노예로 살던 흑인들은 남북전쟁 이후인 1870년 수정헌법 15조에 의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이 투표권을 인정받은 것은 이로부터 50년이 더 지난 1920년에 이르러서다. 가정폭력이나 투표권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법이 규율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은 부당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것은 성폭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 (Rape: A Love Story)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법이 성폭행 피해자보다 가해자인 남성에게 너그러운 것은 비단 외국 소설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성폭행을 당하는 과정에서 가해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뒤 유죄 판결을 받고 가족들로부터도 냉대를 받아야 했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의 한 장면(오른쪽)과 안내문. 사진 한겨레 자료
주인공 티나 맥과이어는 성폭행 범행의 책임 중 상당 부분이 피해자인 여자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딱 떠올릴 만한 여자다. 남편을 암으로 잃은 뒤 12살의 딸과 함께 사는 그녀는 파티가 열리는 곳이라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고 바에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 술을 좋아하고 가끔은 딸도 얼굴을 붉힐 정도로 짧고 섹시한 옷을 입는다. 마을에서는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춤 솜씨를 자랑하기도 한다.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헤픈 여자’라고 생각할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 깊이 딸을 사랑하고 치과에서 안내직원으로 힘들게 일해서 버는 수입으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평범한 가장이다.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여전히 애정을 갖고 있지만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정기적으로 만나는 남자친구와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온 동네가 떠들썩한 독립기념일 밤, 그녀는 딸과 함께 남자친구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잔인하게 성폭행을 당한다.
파티가 끝나고 늦게 귀가하게 된 티나는 딸과 함께 한밤중의 공원을 가로질러 귀가한다. 남편과 함께 그곳에 소풍을 왔던 기억에 잠겨 있던 티나와 딸 앞에 안면이 있는 동네 청년들이 술과 마약에 취한 채 나타난다. 처음에 모녀를 희롱하는 듯하던 남자들은 결국 낡은 보트하우스로 티나를 끌고 가서 윤간한다. 티나의 딸은 가까스로 도망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보트하우스 한구석에 숨어 어머니의 비명을 그대로 듣는다.
마음껏 티나를 유린한 남자들은 피를 흘리는 그녀를 버려둔 채 가버린다. 딸이 숨은 곳에서 나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티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병원에 호송된 뒤에도 몇 주간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게 된다.
사람들은 티나가 성폭행을 당한 것은 그녀의 책임도 크다고 말한다. 소설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1장의 제목이 ‘그녀가 자초했다’이다. “한밤중에 어린 딸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공원에 가다니 얼마나 무책임한가.” “평소 옷차림이나 행실로 봐서 그녀가 남자들을 도발한 것이 아닐까.” “술에 취해서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의 반응이다.
간신히 회복된 모녀는 그들의 삶이 결코 그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티나의 딸에게 어린 시절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물론 법에 호소한다. 전과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범인을 지목하고, 지목된 남자들은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남자들은 혐의를 부인하고 법원은 재판이 열릴 때까지 보석으로 그들을 석방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법정에 모인 첫날, 성폭행 사건을 다뤄본 경험이 없는 젊은 여검사는 허둥지둥하면서 실수를 연발한다. 근엄한 판사는, 티나가 강간당하고 치료받으면서 입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쓴 선글라스와 꽃무늬 스카프를 벗으라고 말한다. “법정 안에 햇살이 내리쬐는 것도 아닌데 선글라스는 벗으면 어떻겠소.” 판사가 농담조로 던진 말이다. 긴장과 불안에 떠는 피해자가 보는 앞에서 판사는 증인으로 나온 경찰관이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가해자들의 가족이 중심이 된 방청객은 판사가 없는 틈을 타서 티나에게 ’창녀’ ’거짓말쟁이’라고 욕을 퍼붓는다.
의붓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해온 대학생 김보은씨는 1992년 친구와 함께 의붓아버지를 살해했다. 구속기소된 두 사람은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진은 김보은씨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시민단체 회원등이 김씨 친구 김진관씨 석방 서명운동을 벌이는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결정타를 입힌 것은 가해자들의 변호인이다. 그 일대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변호사는 티나가 성교의 대가로 피고인들에게 돈을 요구했다고 주장한다. 피고인들은 티나의 권유에 따라서 섹스를 했을 뿐이며, 그녀를 폭행한 것은 피고인들이 떠난 뒤에 온 제3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검사는 티나의 딸을 증인으로 내세웠지만, 변호인은 딸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 성폭행한 남자들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고 반박한다. 가해자들의 경멸에 찬 시선을 받으며, 티나는 재판을 포기한다.
법정 밖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티나의 딸은 학교에서 가해자 중 한 명의 여동생으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상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가해자들은 뻔뻔스럽게 모녀를 노려본다. 한 명은 밤중에 그녀의 집 앞으로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놀리듯이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법에 호소해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구원은 뜻밖의 곳에서 찾아온다. 티나의 딸은 전부터 안면이 있던 젊은 형사에게 절박한 마음으로 구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해자가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한 명은 그 형사에게 무모하게 칼을 들고 덤비다가 죽음을 맞는다. 목격자는 없지만 형사의 행동은 정당방위로 인정받는다. 두 명은 자취도 없이 행방불명이 된다. 사람들은 그들이 혹시라도 강간죄로 처벌을 받을까봐 캐나다로 도망갔다고 생각한다. 또 한 명은 후회에 가득 찬 유서를 남기고 주검으로 발견된다. 물론 그가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해자들이 사라진 뒤 티나 모녀의 인생은 다시 시작된다. 티나는 재혼을 하고 신혼여행지에서 기쁨이 가득 찬 편지를 보내온다. 딸도 결혼을 해서 고향을 떠난다. 남편과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티나의 딸은 가끔씩 자신에게 새 삶을 찾아준 존재를 떠올린다. 물론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던 무기력한 법이 아니라 총을 들고 가해자를 없애준 한 형사의 모습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강간’ 뒤에 따라오는 ‘사랑 이야기’는 딸이 그 형사에게 품은 마음을 뜻한다.
티나 맥과이어 성폭행범을 살해한 형사의 행동에 찬성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짐승 같은 성폭행범이라고 해도, 설사 그들이 뻔뻔스럽게 법망을 피해간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본 가정폭력 사건에서 남편을 살해한 여성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법원의 태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며 우리의 수사 현실을 고려할 때 남편을 살해한 아내의 말만 믿고 쉽게 정당방위를 인정하다 보면 그런 상황을 가장해서 살인극을 벌이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맥주를 마셨다는 죄로 태형을 선고받은 말레이시아 여성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을 때나, 늦은 밤 사무실에서 판례를 읽으면서 남편이 스카프로 목을 조를 때 아래층에 살고 있던 이웃집으로 피했어야 한다는 구절을 볼 때는, 법이 여성들에게 한 모든 일, 그리고 법이 여성들에게 해주지 못한 모든 일이 떠오르면서, 솔직히 침을 뱉고 싶어진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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