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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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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상상하기

등록 2009-09-16 15:35 수정 2020-05-03 04:25

오스트레일리아에 살고 있는 참사람 부족에 대한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부족 모두가 힘을 합쳐 훌륭한 음악회를 열었다. 그날 음악회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작곡가가 말했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인데, 난 오늘부터 내 이름을 그냥 ‘작곡가’에서 ‘위대한 작곡가’로 바꿀 거야.” 2009년 대한민국의 상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뻑’이지만, 참사람 부족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자축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네가 재능이 있다고? 증명해봐!

대한민국에서 상상하기.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대한민국에서 상상하기.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왜 이렇게 다를까? 우리는 대다수가 똑같은 목표를 향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대체로 배타적이다. 내가 1등을 했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이들은 1등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타인의 성취나 성공에 대해 편안하게 반응할 수가 없다. 누구나 원하는 것을 소수만 가지게 되니 기준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인정한 자신의 가치에 대해 사회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네가 재능이 있다고? 객관적으로 증명해봐!” 그래서 우리는 늘 시험을 통해 증명하며 산다. 그렇게 살아온 우리는 시험이 없는 사회, 그냥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사회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수업 시간 중에 존엄사를 인정할 것인가 여부를 두고 찬반토론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논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들어가는 병원비가 가족에게 주는 고통으로 옮겨갔다. 환자 가족은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삶이 피폐해질 것이다, 그러니 존엄사를 인정해주자는 주장과 그렇더라도 돈 때문에 생명을 포기해서야 되겠느냐, 존엄사에 반대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 대목에서 논의는 표류를 시작했다. 돈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하는 정도의 발언이 빙빙 돌아갈 뿐이었다. 학생들은 그 사회가 훌륭한 의료보험 제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 논쟁은 덧없는 게 될 것임을 끝내 생각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각자 알아서 병원비를 부담해야 하는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온 17살 아이들이 그것과는 근본부터 다른 시스템을 상상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가 교복에 대해 요구하는 규정들은 엄격하다. 남학생은 반드시 허리띠를 해야 한다. 바지가 몸에 딱 맞고 늘 조끼나 셔츠 자락에 덮여 있어서 허리띠를 착용했는지 외관으로는 확인할 수조차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요즘 여학생의 교복은 마치 입은 채로 꿰매기라도 한 것처럼 몸에 꼭 끼는 것이 유행인데, 그 상태로는 움직임이 영 불편하다. 교복 회사는 그 문제를 숨은 지퍼로 해결했다. 허리와 소매 부분에 숨은 지퍼를 달아서 돌아다닐 때에는 지퍼를 잠가서 꼭 맞게 입고, 책상에 앉아 있을 때에는 지퍼를 열어 편안하게 입게 디자인해서 맵시와 활동성 모두를 살린 것이다. 그런데 규정에 따르면 그것은 금지된 일이다. 교복에는 어떠한 변형도 가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17살 때에는 아예 교복이 없었다고 하면? 선생님이 농담하는 줄 안다. 아이들은 교복이 없는 학교를 상상하지 못한다.

원래 그렇다는 한숨을 거두는 순간

상상은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상상 역시 사회화의 산물이다. 덕분에 우리는 2009년 대한민국을 이루는 크고 작은 것들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아간다. 모든 것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하루 종일 정직한 노동을 하는데도 생활고에 허덕이는 것도, 아침 7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공부하는데도 성적 걱정을 해야 하는 것도,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는데도 주검을 장사 지내지 못하는 것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상상을 펼친다. 또 다른 세계,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한다. 그에게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사람 사는 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한숨을 거두는 순간, 우리는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순간, 상상력은 날개를 갖는다.

박현희 서울 구일고 사회교사

<font color="#877015"> *이번호로 박현희 교사의 ’노 땡큐!’ 연재를 마칩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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