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손녀랑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중량 초과’로 손녀는 할머니를 혼자 태워보내야 했다. 손녀는 같이 탄 사람에게 크게 외쳤다. “할머니 5층에서 꼭 내려주세요.” 엘리베이터의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5층에 이르자 누군가 말해주었다. “5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녹음된 소리였다. 할머니는 고개 숙여 감사했다. 할머니는 소리 내어 말했다. “네.”
텔레비전에 인사하고 지낸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의 앵커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 텔레비전 화면을 그냥 묵묵히 바라보기가 멋쩍었다. 그는 “감사합니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꽃이 핀다는 소식도 전해줬고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국회를 통과한 법도 알려줬다. 감사한 건 오히려 나였다. 고개를 숙이는 깍듯한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초등학생은 멋쩍음이 계속되자 그냥 인사를 하기로 했다. 혼자 있을 때 시작됐을 텐데, 옆에 누가 있어도 하게 되어, 같이 있던 언니가 “왜 그래” 하고 웃었다. 그렇다고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뒤로 나는 기계와는 그렇게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 대화를 지금은 꽤나 잘하게 되었다. 휴대전화 통화 중 이름 찾기도 할 줄 알고, 텔레비전 리모컨으로 적절할 때 ‘음소거’도 할 줄 알고, IPTV와 TV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재생과 전환을 할 줄 알고, 술이 엉망일 때를 제외하고는 노래방 리모컨으로 ‘곡목 찾기’를 눌러 노래도 불러낼 수 있다. 기계와의 대화법의 요체는 ‘입력’이다. 언제나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어릴 때처럼 텔레비전 속의 ‘것’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은 없다.
이 대화법의 바깥에서 일들이 일어나면 좀 놀라워진다. 몇 년 전 휴대전화가 물에 빠졌다. 얼른 배터리를 빼고 수건으로 물을 닦았다. 몇 시간이 지나서 어찌 되었나 하고 휴대전화를 켰다. 잘 아물어가는 딱지 뜯어보는 심정으로. 휴대전화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화면을 내보냈다. “아무것도 안 되는 상태임” 비슷한 문구였다. 그 뒤 휴대전화는 지지직대더니 말간 얼굴을 들이댔다. ‘전기충격’ 휴대전화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말’은 휴대전화의 어디에 있던 걸까.
기계만이랴, 그곳에 있거니 하는 물건도 의사를 표현할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방 두 개의 가구와 짐을 옮겨 정리하는 와중에 설거지 선반이 와장창 떨어졌다. 도와주러 온 언니에게 “왜 살림 다 부수냐” 하고 났더니, 언니는 딴 방에서 튀어나왔다. 자기 생명이 다한 줄을 알고 이때다 하고 부서져내리는 물건의 아우성. 그리고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그 ‘무섭다’는 형상을 보고야 말았다. 텔레비전의 암전이 찾아왔을 때 잠깐씩 비친다는 그 화면. 앞을 보며 멍 때리고 있는 흉악한 얼굴. 입력자의 망중한. 내가 텔레비전을 바라본 것만큼 텔레비전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나는 기계와 물건과 살고 있다. 그것들이 말을 듣기만 하다가 가끔씩 놀래주니 즐겁다.
구둘래 기자 blog.hani.co.kr/any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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