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사태 사흘 뒤 한 달여 전 예약한 절임배추가 도착했다. 심사가 뒤숭숭해 베란다에 옮겨 뜯지도 않고 놔뒀다. 12월8일 낮에야 쌓인 배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주말을 넘기면 시간도 없고, 배추도 상할 수 있다. 서둘러 상자를 뜯어 절여진 배추를 꺼내고 소쿠리에 널어 물을 빼기 시작했다.
2023년에도 가을 농사가 풍년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법 단단하게 속이 찬 배추 10여 포기는 건져, 간이김장을 해 본가로 가져갔다. 더위와 벌레 이중고를 만난 2024년엔 그마저도 어려웠다. 알배추 몇 개 데려와 겉절이를 해 작은 통 하나 채운 게 전부였다. 배추 맛은 기가 막혀서 익힌 다음 김치찜까지 해 먹었으니, 올가을 농사는 비록 망했으되 ‘졌잘싸’라 할 만하다.
명색이 ‘농사꾼’인데, 2년 연속 절임배추를 사서 김장을 하게 됐다. 김장 노동의 8할은 배추 절이는 일이다. 가을 농사를 망쳐 맘은 불편한데, 절임배추 덕에 몸은 편해졌다. 우리 집 김장은 무채를 쓰지 않는다. 10여 년 전 김장 독립을 하면서 어머니의 김치 레시피에 어느 텃밭 전문 블로거의 비법을 더해 만든 방식이다. 초기엔 이런저런 색다른 시도를 해봤는데, 이젠 어느 정도 방식이 굳어졌다.
절임배추 물이 다 빠지려면 여러 시간이 걸린다. 냉큼 장으로 가 쪽파 두 단과 청각, 쌀가루 등을 샀다. 풀부터 쑤어 식혀야 한다. 쌀가루로 한 냄비, 부침가루로 한 냄비씩 넉넉하게 끓여 베란다에 두고 식혔다. 부침가루 풀은 2~3년 전 쓰기 시작했다. 김치를 담그려는데 쌀가루와 밀가루가 모두 떨어져 궁여지책으로 해봤는데 결과가 좋았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나름 ‘비법’으로 소개돼 있어 신기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쪽파 두 단을 다 까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 이제 양념을 만들 시간이다. 송송 썬 쪽파가 기본이다. 간 마늘은 밥숟가락으로 두세 번으로 족하고, 매실효소로 단맛을 보탠다. 양파와 배, 젓갈은 믹서에 넣고 함께 간다. 보통 젓갈은 황석어젓,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세 종류를 쓴다.
말린 청각은 세척법이 복잡하다. 우선 물에 담가 불렸다가 여러 번 씻고 물 짜내기를 반복해야 한다. 씻어낸 물이 맑아지면 끓는 물에 데치는데, 짙은 초록빛이 돌면 꺼내 다시 헹군다. 청각을 넣은 김치는 시원하고 아삭한 식감도 오래간다. 귀농한 아내 친구가 직접 농사지어 보내온 유기농 햇고춧가루를 화룡점정으로 양념 준비를 끝냈다.
배추를 버무리기 전에 통부터 준비해야 한다. 2023년 씻어 보관해둔 김치통 네 개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마른행주로 안을 닦아보니 먼지 없이 깨끗하다. 물 뺀 절임배추를 식탁으로 옮겨 쌓고, 버무리기를 시작했다. 배춧잎 한장 한장 양념을 묻혀가며 통을 채운다. 한 통이 가득 차면 배추 겉잎으로 위를 덮고 굵은소금을 뿌려 마무리한다. 두 통을 채우고 나니 허기가 졌다. 마침 집에 온 둘째와 함께 방금 버무린 김치 한 대접에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김장 노동의 성패는 양념 안배에 있다. 처음에 너무 양념을 곱게(많이) 하면, 나중에 양념이 모자라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배추를 다 버무리고도 양념이 제법 남아 따로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배추든 무든 갓이든 쪽파든 뭐든 김장양념으로 버무리면 순식간에 맛난 김치가 된다. 숙성된 김장양념을 풀어 넣고 끓인 매운탕도 그만이다. 양념 묻은 그릇 닦고 뒷정리까지 다 마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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