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바람이 찬 4월22일 아침 7시. 강원도 원주시 원주천 둔치 새벽시장 한쪽에서 주부들의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상추 한 상자에 5천원 줬어. 이거 좀 봐. 세상에, 어쩜 이렇게 싱싱해?” “난 열무 2단에 4천원, 배추 5포기 1만원에 샀어. 요새 배춧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말이야.” 원주시 중앙동에서 고깃집을 한다는 조남동(51)씨는 “손님한테 내놓는 채소는 매일 여기서 사가는데, 오늘 상추는 특히 싸게 사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주부 양승희(45·원주시 명륜동)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그 주에 먹을 채소류를 사간다”며 “농사지은 사람이 직접 나와서 파니까 다른 데보다 훨씬 싱싱하다. 또 누가 키웠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안심이 된다”고 했다. 이들은 “새벽시장은 한 번 오기 시작하면 ‘중독’된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농민이 ‘적당히’ 정한 가격
새벽시장은 원주교~봉평교 사이 원주천 둔치 주차장에서 열린다. 이곳 6200여㎡(약 1876평)는 매일 새벽 4시~아침 9시에 새벽시장으로 변신한다. 4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원주의 아침을 깨우는 이들은 ‘새벽시장 농업인협의회’ 회원인 지역 농민들이다. 매일 새벽 직접 재배한 채소와 나물, 과일 등을 들고 나온다.
생산과 판매 ‘투잡스’를 자처한 덕분에 시장이 열리는 기간에 농민들은 보통 하루 4시간 정도밖에 못 잔다. 고된 생활을 하는 이유는 ‘제값’을 받을 수 있어서다. 이아무개(49)씨가 이날 새벽시장에 내놓은 두릅과 취나물, 유정란은 아침 7시도 채 안 돼 모두 팔려나갔다. 이씨는 “바람이 차서 손님이 많지 않을 줄 알았는데 30만원어치나 팔았다”며 “중간상인에겐 그쪽이 정한 가격대로 넘길 수밖에 없지만, 여기선 내가 가격을 적당히 정해 팔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석봉호 농업인협의회장도 “시중에서 배추 한 포기가 2천원에 팔려도, 우리가 받는 돈은 500원이 안 된다. 하지만 직접 나가서 팔면 1천원은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손님의 99%는 ‘물건 참 좋다’고 만족스러워한다”고 했다. 농산물이 여러 차례 ‘거간꾼’을 거치면서 가격은 오르는 반면 신선도는 떨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농민 스스로 끊음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생’하는 곳이 새벽시장이라는 얘기다.
올해로 16년째를 맞은 새벽시장의 성과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원주시 농업기술센터는 새벽시장 매출이 2007년 51억원, 2008년 61억원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70억원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용객도 해마다 늘어, 지난해엔 20만3천 명이 새벽시장에서 물건을 샀다. 농업인협의회 회원도 초기보다 3배가량 늘어난 400명이다. 원주시는 1년에 2천만원가량의 예산을 들여 농민들에게 원산지 표지판을 제작해주고, 생산자실명제와 원산지표시제를 의무화했다. 농민들도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해 다른 지역에서 온 농산물이 유통되는 건 아닌지 단속을 벌여 새벽시장의 신뢰도를 높였다.
하지만 ‘로컬푸드(지역 먹을거리) 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새벽시장은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시장 운영에 소비자의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다. 생산자의 ‘얼굴’은 공개된 반면 소비자는 ‘불특정 다수’인 탓에, 생산자는 언제·얼마나 출하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안정적인 생산·공급이 어렵다는 얘기다. 게다가 새벽시장은 농민 스스로 개척한 ‘판로’이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는 부담도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간다. 버섯을 길러 파는 윤아무개씨는 “새벽시장까지 신경쓰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생산량을 30%는 늘릴 수 있다. 판매뿐만 아니라 시장 질서유지까지 우리가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불만도 없지 않다”고 털어놨다.
원주에서 로컬푸드 운동을 펼치는 김용우 원주생협 지역농업위원장은 “새벽시장이 로컬푸드 농민시장의 맹아긴 하지만,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새벽시장 1곳이 매일 운영되는 게 아니라 원주시 전체를 6~7개 지역으로 나누고, 농민과 그 지역 소비자들이 협의해 장터를 운영하는 등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로컬푸드 운동의 중요한 한 축으로 거론되는 단체급식도 원주에선 눈여겨볼 만하다. 원주 로컬푸드 운동의 ‘메카’인 상지대 생협 구내식당은 2005년부터 원주생협이 생산한 무농약쌀과 유기농 김치를 쓰고 있다. 지난해엔 원주시청 구내식당도, 올해엔 시내 어린이집 40여 곳도 이 쌀을 쓰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시행된 학교급식조례에 따라, 읍·면·동 지역 초등학교 급식엔 원주에서 생산된 쌀 ‘토토미’가 공급됐다. 2008년엔 동 지역 초등학교엔 ‘토토미’가, 읍·면 지역 초등학교엔 원주생협의 무농약쌀이 공급됐고, 올해는 모든 초등학교와 읍·면 지역 중학교에 무농약쌀이 공급된다.
조세훈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은 “학교급식조례는 지역에서 생산된 친환경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자는 내용이었는데, 2007년엔 관행농업(농약과 제초제 등을 사용하는 일반 농업)으로 생산된 쌀이 공급됐다. 본래 취지대로 정책을 시행하라는 생협과 친환경농업 관련 단체들의 요구를 시가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초엔 ‘친환경급식지원센터’도 만들어져, 원주에서 생산된 유기농산물의 단체급식 공급을 확대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전국 각지의 생산자조합에서 먹을거리를 공급받는 보통의 생활협동조합과 달리, 원주 지역의 생협은 최대한 로컬푸드를 다룬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원주생협에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조합원으로 활동하는데, 생산자 조합원이 250명, 소비자 조합원이 1050명이다. 생산자 조합원은 대부분 호저면 농민들이다. 소비자 조합원은 4~9월 매달 한 차례 호저면에서 열리는 농촌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6~10월 매주 금요일 단구동 매장에서 생산자가 직접 물품을 판매하는 농민장터를 찾아 생산자 조합원과 거리를 좁힌다. 단구동 매장에선 물론 1차적으로 호저면 생산물을 판매한다. 최근엔 원주한살림생협과 머리를 맞대, 조합이 달라도 원주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공동으로 판매하자는 논의도 진행하고 있다.
인구 30만 명인 원주가 이렇게 우리나라 로컬푸드 운동의 ‘발원지’로 꼽히게 된 데는 이곳이 도농복합지역이라는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 생산하는 곳에서 곧바로 소비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로컬푸드 운동가들은 이 지역에서 20년이 넘은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주민들에게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렸고, 농민들이 운영하는 새벽시장 등도 활발하게 운영돼 ‘안전한 지역 먹을거리’라는 인식이 퍼졌다는 점도 로컬푸드 운동이 비교적 빠르게 확산되는 배경으로 꼽았다.
원주는 이제 또 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로컬푸드 인증제’ 실시를 추진하는 것이다. 로컬푸드 인증제란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의 안전성을 보장해주는 것을 말한다.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와 친환경급식지원센터 등 로컬푸드 운동단체들은 △원주에서 생산된 배추·무 등 채소를 다듬고 포장할 ‘전처리 센터’ △두부·콩나물·돈가스·장류·김치류 등을 생산할 ‘가공센터’ △로컬푸드를 시민들에게 알릴 ‘교육·사무동’ 등으로 구성된 ‘원주푸드 종합처리센터’를 설치하자고 지난 2월 시에 제안했다. 로컬푸드가 ‘저탄소 녹색성장 산업’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시는 40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한강수계기금 25억원을 신청했다. 6~7월께 기금 지원이 확정되면, 시는 나머지 15억원을 부담해 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다.
운동단체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원주푸드’를 피부에 와닿도록 하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가령 센터에서 공급되는 식품엔 원주푸드 인증마크가 붙는다. 인증마크는 원주푸드 판매처를 비롯해 지역 먹을거리를 사용하는 식당과 단체급식소, 가공업체 등에도 사용될 수 있다. 원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먹을거리는 가장 가까운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해 ‘제휴푸드’로 인증하고 유통시키자는 구상도 나온다. 2006년 농업통계를 적용하면, 쌀·보리·고구마·시금치 등 32개 품목의 칼로리 기준 원주 지역 자급률은 50%다. 하지만 바로 이웃한 횡성군까지 포함하면 자급률은 111.4%로 뛰어오른다. 원주에선 생산량이 많지 않은 팥·토마토가 횡성에선 많이 나고, 반대로 횡성에선 기르기 힘든 시금치·고구마가 원주에선 남아돌기 때문이다. 즉, 로컬푸드의 범위를 인접한 지역과의 관계로 확장하면, ‘원주권’ 안에서 모든 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가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올 하반기엔 ‘지역식량계획협의회’ 설립과 관련한 조례 제정도 주민발의 형식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지역식량계획협의회란 해당 지역의 지속 가능한 식량정책과 식량자립 계획을 세우는 ‘민관 협치’ 기관으로, 농민·소비자단체와 협동조합 대표, 유통업자, 가공업체, 지방자치단체 등이 참여한다. 김용우 원주생협 지역농업위원장은 “로컬푸드 운동은 궁극적으로 신선·안전·환경·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으로, 생산·가공·유통·소비에서 ‘세계 식량체계’에 대응하는 지역 고유의 식량체계를 지향한다”며 “이를 위해선 이벤트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원주=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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