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투르다. 그런데 내 직업은 기자다. 두 가지 사실은 배반이며 불화의 관계다. 업무상 필요로 만났다가 친구나 형님·아우 관계로 발전한 몇몇 취재원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내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밑천은 고교 시절 만났고 지금도 고단한 서울 생활을 함께 이어가는 세 친구다. 일주일쯤 출장 뒤엔 늘 현관문 비밀번호가 헷갈리고, 방 안에선 자꾸만 열쇠와 동전들이 사라지지만, 나는 그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또렷이 기억한다. 먼 남쪽 바닷가, 그들의 옛 고향집 전화번호와 뒷자리가 똑같기 때문이다.
송년회 장소를 정하려고 금요일 오후 3시께 전화를 걸었을 때, A는 극장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한 달째 무급 출근 중인데, 오늘은 도무지 할 일이 없었다고 했다. A가 다니는 중소 벌크선 운영선사는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사례로 에 소개되기도 했다. 올 초만 해도 해운업 대호황이 지속됐고, A의 회사는 17만t 케이프급 벌크선을 새로 사들였다. 그러나 요즘 부산항 야적장엔 컨테이너와 화물들이 쌓여 있고, 위풍당당하다던 그 벌크선은 거제도 인근에 묶여 있다고 들었다. 회사는 ‘거의’(?) 사라졌다는데, 사장님은 어디로 갔을까.
20년 지기인 B는 어려서부터 입이 무겁고 엉덩이도 무거웠다. 그와 내가 처음 말다툼을 벌인 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이었다. 국책연구기관에 다니는 그에게 “니들이 정권 입맛대로 경제효과를 뻥튀기한 보고서를 냈다. 나한테 죄상을 제보하고 귀순해라”라며 농담 반 진담 반 공격한 게 빌미가 됐다. 나는 화해를 위해 목돈을 썼고, 제수씨는 화장품 세트를 얻었다. 3년마다 재계약을 하는 연구원 신분인 그는 내년 봄 국책연구기관 통폐합이 걱정이다.
C는 대학 때 세상 고민이 많았다지만, 우리는 그를 운동권으로 봐주지 않았다. 다만 연애를 위한 노력과 정성은 인정했다. 참한 동료 교사를 만나 결혼한 지 한 4년쯤 됐나. 애가 들어서지 않는 게 제일 골칫거리였던 부부에겐 요즘 새로운 걱정이 있다. 거실의 컴퓨터를 과연 버려야 할 것인가를 놓고서다. 역사 교사인 그의 아내는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다른 회사 것으로 바꾸라는 학교 쪽의 횡포와 강압을 언론사들에 제보했다. “책꽂이에 꽂힌 도 국가보안법으로 걸어버릴지 모르는 공안 세상이라 불안하다”고 C는 말했다.
이번 송년회 장소는 홍대 앞이다. 갈수록 술 실력이 줄어드는 추세라, 올해 3~4차는 기대하기 힘들다. 술자리의 안줏감은 어떤 얘기가 될까. 우리는 2009년 해운업의 불황, 공포정치, 구조조정의 광풍, 그리고 연애 소식이 없는 노총각의 미래가 걱정이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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