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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 캠페인] 인권 대행진을 그리자

‘얼어붙은 세상을 녹인다 2008 인권선언’ 운동을 시작하며
등록 2008-10-24 15:46 수정 2020-05-03 04:25

지난 10월15일 새벽 5시께, “기륭 컨테이너 강제 철거 중 폭력용역·구사대 동원 연대 요청”이란 문구가 휴대전화로 전달됐다. 용역깡패와 구사대가 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장을 침탈해 천막과 컨테이너를 강제로 철거하더니 이에 항의하는 노조원들과 연대 농성 중이던 시민들까지 폭행했다. 94일째 단식 농성으로 탈진했다가 복식하면서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기력을 회복한 김소연 분회장도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결국 다시 탈진해 119 구급차에 실려갔다. 덩치가 산만 한 용역들에 의해서 팔이 부러진 사람을 비롯해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더 충격을 받았던 것은 이런 폭행 현장을 경찰들이 지켜만 보더라는 것이다. 경찰의 수수방관 속에서 그들은 깡패로 변해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둘렀다. 노동자의 노동할 권리를 주장하며 12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농성투쟁을 이어온 여성 조합원들, 그리고 67~94일에 걸쳐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단식을 해야 했던 그들에게 인권은 너무도 먼 얘기다.

10월5일 ‘세계 주거권의 날’을 맞아서 장애인, 노숙인, 쪽방거주자, 철거민, 세입자 등 주거 빈민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주거인권 선언’ 운동을 시작했다. 한겨레 이종찬 기자

10월5일 ‘세계 주거권의 날’을 맞아서 장애인, 노숙인, 쪽방거주자, 철거민, 세입자 등 주거 빈민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주거인권 선언’ 운동을 시작했다. 한겨레 이종찬 기자

30개 조항은 인간답게 사는 최소 기준

주거의 권리를 외치는 뉴타운 개발 지역의 철거민들에게도 용역깡패들의 폭력과 경찰의 방관·방조는 어김없이 나타난다. 봄부터 여름 내내 키웠던 벼를 갈아엎는 농민들의 무너지는 가슴에도, 성폭력과 온갖 차별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여성들과 인신매매당하는 장애인·노숙인들, 그리고 경쟁에 내몰리면서 1년에도 수백 명씩 죽음의 길을 떠나는 청소년들,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성적 소수자들에게도 인권은 없다.

인류는 60년 전, 인류의 가장 고귀한 약속이 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다. 그 선언은 전문에서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하였음”을 통찰하고,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세계의 도래”를 열망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의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임을 선언한다. 인(人)의 지배를 통한 자의적 권력의 행사가 낳은 부작용에 대한 반성에서 법의 지배를 통한 인권의 실현을 선언한 것이다.

30개에 이르는 각 조항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천명됐다. 거기에는 인간의 생명권에서 신체의 자유, 사상과 양심의 자유, 정치적 권리,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살기 위한 최저 기준들이 명제로 정리돼 있다. 이 선언에서 시작해 인류는 국제 인권 조약들을 차례로 만들어내면서 인권 기준을 매번 새롭게 설정해왔고, 그런 성과에 바탕해서 이제 인권은 국내 주권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 시스템에 의해서 존중되고 실현돼야 할,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는 가치가 됐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유와 평등, 연대’라는 인권의 핵심 가치들은 이윤과 경쟁의 논리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하다. 국가는 인권의 존중·보호·실현이라는 3중의 의무를 지고 있지만, 이제는 자본의 이윤 증식을 위해서 저항하는 민중을 억압하기에 여념이 없다.

더구나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 인권은 심각한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 100일 넘게 광장을 밝혔던 촛불에 대한 탄압, 인터넷 공간을 침묵의 바다로 돌려놓으려는 각종 억압책들, 권력에 무비판적으로 순종하는 언론을 만들려는 일련의 언론 장악 시도들, 그리고 국정원을 비롯한 공안기구들의 위상 강화를 위해서 추진되는 각종 악법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노동의 권리도, 건강권도, 교육권도, 주거권도, 사회보장권도 모두 부정되고, 소수의 부자들에게 부를 더욱더 몰아주는 경제정책과 사회정책들은 불평등을 심화하고 빈곤층만 늘릴 게 뻔하다.

그래서다, 인권단체들이 세계인권선언의 조문들을 억압과 불평등의 현실로 끄집어내 그 의미를 되짚고, 선언의 조문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절박한 요구들을 새롭게 인권선언으로 정리하자고 제창하는 것은. 60년 전 인류가 2차 세계대전의 암담한 잿더미 위에서 인권 가치의 소중함을 역으로 확인했듯이, 민주주의와 인권이 한순간에 무시되고 경멸받는 이 현실에서 오히려 인권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내자는 것이다.

‘더 강한 민주주의’와 동의어인 현실

우리는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쳤고, 경쟁교육 반대를 외쳤고, 민영화 반대를 외쳤고, 잘못된 정책을 추진하는 이명박 정권의 광기에 반대했다. 광장에서 외쳤던 그 모든 주장은 바로 우리 사회의 가장 절실한 인권 항목들이다. 소수만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치의 주체임을 선언했던 감격스런 순간이 있었다. 인권이 ‘더 강한 민주주의의 동의어’가 돼가는 현실에서 인권 주체가 새로 섰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난 10월5일 ‘세계 주거권의 날’을 맞아 주거권 선언을 채택해 발표했고, 17일 ‘세계 빈곤 철폐의 날’에도 빈곤에 맞서는 인권선언이 발표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2월 인권주간에 권리선언을 채택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인권의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2008 인권선언기획단’은 온라인 카페 ‘2008 인권선언’(cafe.daum.net/2008humanrights)을 열어 10월25일부터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권리를 표현한 글을 올릴 수 있게 하고, 11월20일께 인권선언 초안 마련을 위한 포럼과 문화제를 열 예정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시된 권리들을 하나의 통합된 선언문으로 작성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가 주장하는 권리들이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연대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인권선언을 들고 정부와 국회, 사법부가 이를 수용해 인권을 실현하도록 압박하는 대행진을 12월 초에 전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8조는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힘들고 암담할수록 인권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이 불씨가 되어 이 얼어붙은 세상을 녹일 인권선언의 제안자가 되어 토론하고 실천자가 되는 일,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은 그렇게 역동적으로 기억돼야 한다. 그리하여 ‘얼어붙은 세상을 녹인다 2008 인권선언’ 운동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박래군 한겨레21인권위원·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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