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항 발행인
밥상에서 김건이 말했다. “빨리 5학년이 되면 좋겠어.” “왜?” “역사 공부 하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 “응. 왕건이나 대조영 같은 거 너무 재미있어.” “그래, 역사는 재미있는 거야.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생각보다 재미없을 거야.” “왜?” “그건 말이야..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거든.” “역사가 아니라니?” 김건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다. “역사가 뭐지?” “응, 옛날에 있었던 사건이나 전쟁 같은 거 아냐?” “큰 사건이나 전쟁만 역사는 아니야. 우리 집에도 역사가 있고 건이에게도 역사가 있지. 여기 부러졌던 일 기억하지?” “당연하지.”
무조건 열심히…
녀석은 세 살 때 어느 날 미끄럼틀에서 놀다 다리가 부러졌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디 한 번 부러지는 거야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그게 사건이 된 건 그러고 울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잠이 깨서 나오는 아이가 한쪽 다리를 짚지 못해 병원에 가보니 골절이라고 했다. 깁스를 하는 의사가 웃을 만큼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김건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작은 역사가 되었다.
“그게 몇 년 몇 월 며칠이었지?” “몰라.” “그럼 깁스한 병원은?” “몰라.” “의사 이름은?” “몰라, 아빤 기억해?” “아빠도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날짜, 병원 이름, 의사 이름만 알아내선 그 사건에 대해 건이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한다면 어때?” “바보 같지.” “학교에선 그런 걸 역사라고 배워.” “정말?” “누나한테 물어봐.” “누나!” 김건은 제 누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그의 누나가 5학년 첫 시험을 준비하면서 역사 때문에 힘들어하던 걸 떠올렸다. 부여의 첫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두 번째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따위를 외우면서 말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공부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과 깨우침이 담겼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을 거듭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공부는 지적 통찰을 체득하는 정신 수련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서양 학자의 서재와는 달리 동양의 학자 공부방에는 몇 권의 책만 있었다.
서양식 공부가 도입되고 아이들이 배우는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이 아니게 되고도 한참 동안 부모들은 동양식 공부법에 젖어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길 기대했고 요구했다. 대략 지금 아이들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는 어떤 공부를 강요하는가
그런 우리는 지금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게 하는가? 우리는 오히려 공부에 대한 깨우침이 없었던 우리 부모들보다 더 한심하고 무지스럽게 아이들에게 역사 아닌 역사, 국어 아닌 국어, 수학 아닌 수학을 강요한다. 우리는 한술 더 떠 우리에게 난생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주었던 인문 사회과학 책들을 모조리 다이제스트판으로 달달 외우게 한다. ‘논술 필수 고전’이라 불리는 그 명단엔 심지어 까지 들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들이 진짜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20여 년을 달달 볶는 동시에 그들이 입시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지적 희열을 느끼기 위해 보존되어야 할 지적 감수성의 부위들마저 하나하나 불로 지져 영원한 지적 불감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이른바 부모가 된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반복하는 교육적 실천이다. 그렇게 하루의 실천을 마친 우리는 인사동이나 신촌의 지적인 카페에 둘러앉아 지적인 얼굴로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야” 떠들어댄다. 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된 인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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