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며칠 전 집동네 문방구에 들러 원고지를 샀습니다. 독자들께 드리는 첫인사를 원고지에 채워보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약간 노란빛을 띤 종이 위의 한칸 한칸에선 아련한 향수가 느껴졌습니다. 컴퓨터 덕으로 지금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치는’ 시대이지만, 1990년 에 둥지를 틀고 첫 기사를 원고지에 써내려가던 때의 긴장과 설렘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첫머리를 이렇게 채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시각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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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로 출근하는 아침, 차 안에서 꼭 쳐다보곤 했던 한 인터넷 언론매체의 광고 문안입니다. 어리석은 시각과 싸우겠다는 취지의 이 광고는, 언론과 언론인이라는 존재의 숙명을 함축적으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광고 문안을 이렇게 바꿔 되뇌곤 했습니다.
“그래, 세상에 뉴스는 많아. 문제는 관점이야.”
말 그대로 세상엔 뉴스가 넘쳐납니다. 문화관광부 홈페이지에서 정기간행물 통계를 찾아봤습니다. 지난 8월 현재 우리나라에선 일간신문 178개, 주간지 2601개, 월간지 2974개, 인터넷 신문 476개 등 모두 8202개의 정기간행물이 발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다 인터넷 포털과 각종 블로그까지 포함하면 정말로 ‘만인이 뉴스를 생산해 만인이 소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뉴스가 넘칠수록 이것을 가지 치고 자리매김시키는 관점의 가치는 소중해집니다. 이 지향하는 관점은 어떤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고 두서없이 생각을 원고지에 나열해봤습니다. 진보, 공동체주의, 평화와 통일,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 세상과의 소통, 이타심(利他心), 자기부정과 혁신…. 여러 좋은 의미의 단어들을 적어내려가도 딱 부러지게 “이거다”라고 소리칠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혼란스럽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가치들이 변화 혹은 진화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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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원고지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위해봤습니다. 의 지향점을 꼭 짚어내지 못한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고,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것이 많아 다행이라고. 물론 원고지에 적어내려갔던 단어들의 뭉뚱그림 속에 지향점은 자리잡고 있겠지요.
대신 첫인사에서 이것만은 약속드리고 싶습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 10돌을 기념해 출간한 자전적 기록 의 제목처럼, 세상을 바꾸는 꿈을 잊지 않겠습니다. 낮고 굵은 목소리로,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 늘 독자분들과 대화하겠습니다. 제 전화번호는 02-710-0511입니다.
창간호부터 지난 632호까지 12년 남짓 의 큰 나무였던 고경태 전 편집장에게 감사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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