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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눈물 | 임원혁

등록 2005-01-12 00:00 수정 2020-05-02 04:24

▣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지난해 12월8일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주둔하고 있는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했다. 아르빌에 도착한 노 대통령은 감정에 북받친 듯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장병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악조건을 이겨내고 ‘평화와 재건’에 애쓰는 모습을 보고 감격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기만과 위선으로 점철된 이라크 전쟁에 동참할 것을 종용하는 미국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장병들을 이라크로 보낸 것에 대한 미안함과 비통함이 서린 눈물일 것이다.

잘못된 전쟁, 원인을 제거해야

노 대통령이 아르빌에서 눈물을 흘린 날로부터 40년 전인 1964년 12월8일 또 다른 대통령이 이국땅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에서 서독으로 온 광부들을 격려하기 위해 루르 지방의 탄광지대를 방문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100위 수준밖에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소중한 외화를 벌어들였고, 이들의 노동력과 노임을 담보로 하여 우리나라는 서독에서 상업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다. 얼굴과 작업복이 온통 석탄가루와 흙으로 뒤범벅된 광부들 앞에서 박 대통령은 격려 연설을 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놓읍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연설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백영훈,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참조). 나라가 부강하지 못하여 젊은이들이 이국땅에서 고생하도록 한 데 대한 미안함과 비통함이 서린 눈물을 흘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이 숙명처럼 받아들인 가난에서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월례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수출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집권기간 동안 무서운 집념으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해 빈곤에서의 해방이 가능하게 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기회주의적 행동이나 재임기간 중의 독재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박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서 흘린 눈물도 경제개발을 향한 집념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미안함과 비통함이 서린 눈물이 아니라 비장한 결의를 담은 눈물이 되었다.

노 대통령이 아르빌에서 흘린 눈물도 마찬가지다. 그 눈물이 미안함과 비통함의 차원을 넘기 위해서는, 잘못된 전쟁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보내게 된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외국에 전투병을 파병함에 있어 동티모르 원칙을 지켜주기 바랐다. 국내의 지지는 물론이고 주둔대상국의 국민들도 파병을 환영하며 국제사회에서도 명분이 있는 개입으로 생각하여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경우 다소 위험이 있더라도 전투병을 파병하는 것이다. 이라크 전투병 파병은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파병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반미 좀 하면 어떠냐?’ 식의 과잉 발언을 만회하기 위해서일까? 우리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뤘음에도, 40년 전 베트남에 파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정책이든 미국의 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생각해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마지못해 파병한 원인이 대략 이런 것이라면 집념을 가지고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외교적으로 다소 마찰이 있더라도 우리 입장을 설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라크에 파병한 자이툰 부대의 주둔 지역이나 목적이 변경되는 것은 막아야 하며, 더 이상 수렁에 빠져들지 말고 철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라크 상황은 어차피 미국이 손을 뗄 의사를 보이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의 반대급부로 북핵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라면, 선언만 할 것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 주변국을 대상으로 행동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해야 한다. 이처럼 자주외교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집념과 정책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노 대통령이 아르빌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는 퇴색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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