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수연/ 소설가

그때 그때 세상의 정세나 일어난 일, 사전에 나오는 ‘시사’(時事)라는 단어의 뜻이다. 나의 인생은 어디 들어 있나? 나도 별별 짓 다 했는데 아무도 사건이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좋다. 그러면 세상은 뭘 했을까? 아침에 문 앞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보면 인상부터 구겨진다. 빈집인 줄 알고 도둑이 들어올까봐 신문 주워들고 문 닫는다. 며칠 혹은 몇달 전과 다르지 않으므로, 요즘 신문은 전혀 시사적이지 않다. 세월의 책임 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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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과 황학동 사람들이 말하니
“이제 미국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정당화할 필요가 없지요, 이겼으니까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입니다. 이라크 전쟁도 훗날 몇권의 책과 기록만 남을 것입니다.”
날씨 보려고 켠 텔레비전에서 아랍 방송국의 한 프로듀서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주장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가깝게는 소말리아와 보스니아 사태를 겪었음에도, 인류는 이라크 전쟁 또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자유와 인권을 위한 불가피한 결단이라고, 우리나라도 파병하면서 떠들었다. 그걸 또 잊었다. 지난해에 그랬다고, 올해 이야기하면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지금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말만 했던 것처럼 다들 테러니 안보니 한다. 슬슬 북한의 인권 문제가 들먹여지고, 언젠가 또 다른 결단의 국면이 닥칠지도 모른다. 잊었기 때문에 되풀이되는 과거. 4대 법안 개정안을 저지하는 수구세력에게 최근 2, 3년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기간이다. 싹 지워져서 그 이전과 자국 없이 이어져야 할 공백기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다가 과거를 고스란히 자기들한테 반환하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과거밖에 없다. 그들은 과거를 사죄한 적이 있는데, 과거의 무엇에 대해서 잘못을 빌었는지 잊었다. 그리고 우리도 잊었다. 그저 정치인들은 그렇겠거니 한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될지라도 지금 사는 우리는 되풀이해 살지 못한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 과거에 갇혔다.
“어제가 행복한 날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사라지고 나면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또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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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동이 뜯겨나간 뒤 33층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빈 공터에서, 한 노점상은 막걸리 한잔 걸치고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청계천 사람들 인터뷰집 ). 청계천 공사로 손님이 끊겨 하루 매상이 1만원도 안 되는 붕어빵 장사 아저씨도, 임대료를 못 내 쫓겨나게 된 다방 주인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정작 과거에는 정신없이 먹고사느라 행복한지 아닌지 생각할 새도 없었으나, 그래도 나중에는 나아질 거라고 믿고 살았다고 했다. 그 나중이 지금이 되어 남은 건 마찬가지로 막막한 미래밖에 없을지라도, 과거는 희망이 있었으므로 아름다웠다고. 열네살에 서울에 올라와 20년 동안 ‘미싱사’를 했다는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린 나보고 선생님이 ‘너 앞으로 잘살 거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위안 삼아 살았어요. 자가용 타고 선생님 찾아보고 싶은 꿈이 있는데 아직 쉽지 않아요.”
나아질 것도 달라질 것도 없이,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라면 누가 행복할 수 있겠나. 인간은 희망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기도 하다. 미래가 없으면 현재도 의미를 잃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내세 때문에 현세를 희생하고, 자기가 죽은 뒤 조국의 장래를 위해 본인의 죽음을 무릅쓰기까지 하는 애틋한 동물이다.
나는 올해를 기억해두겠다. 과거에 붙잡힌 이 갑갑한 정체를 잊지 않겠다. 다음해에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올해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나는 올해도 살았으므로 다음해에는 달라지리라 믿는다. 올해가 싹 지워진다면 올해도 나름대로는 정신없이 살았던 우리가 불쌍하지 않은가. 지금 살기 위해 나는 미래가 필요하다. 설사 몇권의 역사책조차 남지 않을지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야만 지금이 아름답다. 시간이 흘러 이 시대를 되돌아볼 사람이 우리가 아니고, 우리는 사라지고 없더라도 좋다. 그런 날이 오겠지, 지금이 과거가 되고 그때는 희망이 있었으므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할 미래가. 그거 믿고 나도 석양에 막걸리 한잔 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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