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그가 속한 가정과 사회의 규범에 적응하도록 진화해왔다. 어린아이는 팔과 다리를 움직여 주변을 탐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다양한 상황과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그런 위험에서 아이를 지켜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키우는 것이 부모와 사회의 역할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을 지키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범과 가치를 내면화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규범과 가치는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변한다. 가족이 중시되고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전통 사회에서는 더불어 사는 지혜가 중심적 가치지만, 개인을 강조하고 자연을 대상화하는 근대 시민사회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의무가 규범의 뼈대를 이룬다.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19세기 말까지도 자연을 대상화할 줄 몰랐고, 따라서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축적해온 서구 문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내내 서구 문명을 추종해온 우리에게 과학은 생존 수단으로 이해됐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진 않아과학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근본 관념을 뒤엎는 혁명적 사상이기도 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광활한 우주의 한 점일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유구한 세월 동안 박테리아와 같은 하등 생명체로부터 진화해온 자연선택의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의 발견으로 인해 자연과 인간에 부여된 신비감이 사라지고 인간의 지위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과학적 세계관의 등장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객관적 탐구를 가능케 한 혁명적 계기이기도 했다. 인간은 외부에서 주어진 규범에 적응해야 하지만 때론 적응의 조건조차 변화시키는데, 과학이 그 엄청난 변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생명의 본질에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생명체의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물질이 DNA라는 분자이며 그 구조는 네 가지 염기가 두 개씩 쌍을 이뤄 만들어내는 이중나선으로 됐다는 사실이 발견됐고, 1970년대에는 DNA 분자를 자르고 붙일 수 있는 제한효소가 발견돼 박테리아의 형질을 마음먹은 대로 변경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학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유전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다. 1975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아실로마에 모인 과학자들은 유전자재조합 기술의 잠재적 위험성에 주목하고 그 위험을 막을 수 있는 실천적 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어떤 규제도 과학자의 탐구욕을 막지는 못했고 21세기가 시작되던 즈음에 과학자들은 인간 DNA 구조를 낱낱이 기록한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언론은 이제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담은 암호 책을 갖게 되었다고 흥분했다. 우리나라의 과학자가 체세포핵이식 기술을 이용해 줄기세포를 생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흥분한 것은, 체세포핵이식으로 이식된 유전정보가 바로 생명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분자생물학의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생명체의 형질발현이 유전정보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졌다. ‘후성유전’(Epigenesis)이라 알려진 이 현상은 유전자로 인해 발생한 단백질과 세포 내외의 환경이 거꾸로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주는 되먹임 구조로 돼 있다. 지금은 유전자가 생명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모든 형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의 상호작용론이 대세다.
환경에 따라 변화 가능한 뇌회로
뇌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20세기 과학의 또 다른 성과다. 유전학이 생명의 미래와 운명을 다룬다면 뇌과학은 생명의 마음을 다룬다. 운명과 마음 모두 전통적으로 철학과 신학, 또는 심리학과 윤리학의 영역이었으므로 유전학과 뇌과학은 이 인문학과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전학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과학의 발달로 인해 그 대상의 본질 자체가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유전자는 형질을 결정하는 인자로 여겨졌지만, 연구 결과 일정 방향으로 형질을 발현시키는 하나의 지향성일 뿐이며 그 지향성은 다른 유전자가 발현시킨 단백질의 영향을 받아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뇌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세기 뇌과학은 뇌와 그것을 구성하는 신경세포의 물질적 상태가 원인이고 마음과 행동이 결과인 구도를 따라 발전하고 그 구도에 충실한 증거를 생산했지만, 연구 결과가 축적될수록 구도 자체를 변경시켜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마음을 컴퓨터와 같은 신경세포의 복잡한 계산 결과로 환원하거나 단순한 자극과 반응의 관계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마음은 생존과 적응의 기제이며 뇌는 그 마음의 물질적 바탕이다. 따라서 마음은 순수하고 투명한 절대정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적응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할 뿐이다. 음식에 욕심을 내고 매력적 이성에게 끌리며 주어진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마음이 그렇게 진화한 인간의 첫 번째 자연이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첫 번째 자연을 초월한 두 번째 자연 또한 진화시켰다. 합리적·논리적·객관적인 공평한 마음이 그것인데, 두 번째 자연인 마음이 과학과 윤리를 비롯한 인류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대략적으로 첫 번째 자연은 생존 본능에 충실한 뇌간을 중심으로 한 부위를, 두 번째 자연은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판단을 내리는 데 관여하는 전전두엽을 진화시켰다.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보다 큰 것은 전전두엽이 크게 발달한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 본성을 발휘하는 뇌간은 끊임없이 전전두엽의 이성적 신호를 참조한다.
10년쯤 전에는 인간의 뇌가 다른 사람의 뇌와 공명을 일으킨다는 과학적 증거인 거울신경세포가 발견됐다. 나의 뇌는 나와 교류하는 다른 사람의 생리적 상태와 공명을 일으켜 그 사람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인데, 거울신경세포가 그 역할을 한다.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나고 폭격에 사지를 잃은 이라크 소년의 모습을 보면 몸서리가 쳐지는 것은 우리가 이기적 본성을 이성으로 순화해서가 아니라 우리 본성이 본질적으로 타인과의 공감을 포함한 것이기 때문이다.
뇌과학은 뇌회로가 유전적으로 방향지어져 있기는 해도 몸과 외부 환경의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DNA의 지향성이 후성유전에 되먹임돼 새로운 방향성을 갖게 되는 현상과 유사하다. 뇌가 손상된 환자의 재활치료가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신경세포가 새로운 신경접합을 만들어내 손상 부위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직선적·기계적 사유 극복할 가능성뇌는 몸과 자연의 생물학적 규범과 그가 속한 사회의 윤리적 규범에 의해 발달 방향이 제한되지만, 몸 내·외부의 자연적·사회적 환경의 맥락에 따라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는 순환적 구조를 갖는다. 뇌과학의 윤리 또는 신경윤리라는 새로운 학문은 뇌과학이 밝혀낸 새로운 사실을 윤리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과학적 사실과 그 속에서 창발하는 윤리적 가치의 상호관계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기도 하다.
이런 논리는 과학과 인문학의 일반적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과학과 인문학은 서로 우열을 다투는 경쟁자가 아니라 유전자와 형질, 또는 신경세포와 마음의 관계처럼 사실과 가치가 서로에게 되먹임되면서 함께 진화하는 상보적 존재다. 의사이자 생물학자이며 철학자이기도 한 알프레드 토버의 말처럼 과학은 “사실과 가치의 관계가 진화하는 양상”이다.
뇌과학은 다양하고 복잡하며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신경세포의 연결망을 연구함으로써 그동안의 과학이 의지해온 직선적·인과적·기계적 사유 양식을 극복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탄생시킬 21세기 과학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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