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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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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명령 거부하는 이야기꾼, 뇌

유전은 과학적 사실이지만 완벽한 각본은 안 돼…

무한대에 가까운 뇌의 활성 패턴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지는 인간의 삶
등록 2010-12-02 10:33 수정 2020-05-03 04:26

1992년 2월 미국 시사주간지 의 표지 모델로 한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등장했다. 천진난만한 모습의 아이 얼굴을 클로즈업해 보여주고는 ‘이 아이가 게이(gay)일까요?’라는 엉뚱한 제목을 달아놓았다. 성적 취향이 유전되는지에 대한 과학적 논쟁을 바라보는 대중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이미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제의에 사용되는 동물의 간 모습을 본뜬 점토 모형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모형에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구획을 지어놓았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의 간을 꺼내 그 모습과 상태를 보고 미래를 점쳤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점토 모형은 예측에 필요한 표준 모형이었을 것이다.
골상학은 미신, 유전자는 과학?

» 유전은 분명한 과학적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 유전자가 써준 각본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과 인간의 DNA를 합성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는 설정의 공상과학 영화 <스플라이스>의 한 장면.

» 유전은 분명한 과학적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 유전자가 써준 각본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과 인간의 DNA를 합성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는 설정의 공상과학 영화 <스플라이스>의 한 장면.

19세기 유럽에서는 두개골 각 부위의 크기와 모양을 사람의 27가지 특성(생식 본능, 자식 사랑, 우정, 자기보호 본능, 폭력, 야망, 종교 등)과 연관짓는 골상학(phrenology)이 크게 유행했다. 지금은 사이비 과학으로 여겨져 과학사 연구자 말고는 관심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인기 있는 과학이었으며 뇌를 정신활동의 근원으로 본 최초의 과학 연구이기도 했다. 뇌의 특정 부분을 특정 기능과 연관짓는 사유 양식이 현대의 뇌과학으로 이어진 점에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점토로 만든 간은 미신이고 골상학은 사이비 과학이다. 하지만 동성애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지에 대한 논쟁에는 진정한 과학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동성애 유전자가 존재하는지 논쟁을 벌이든 말든, 우리는 어떤 유전자가 그 주인을 게이로 만든다는 명제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 과학 그 자체를 믿어버리는 것이다.

희생동물의 간, 두개골 형태, 유전자는 각 시대가 선택한 미래 예측의 수단이자 기준인데, 그 기준 자체를 믿지 못하는 시대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간 모형과 골상학은 흘러간 옛이야기지만 유전자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현실적 존재다. 유전자는 실리콘칩과 함께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다. 이제 유전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과 관련된 어떤 현상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유전자를 변형시켜 만든 식품을 소비하고 유전공학 기술로 생산된 의약품을 처방받는다. 유전자 검사는 범죄수사나 친자확인과 같은 사회적 영역에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기이식 등 의학 분야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술이다. 5년 전 한국의 한 과학자가 사람의 난자에 다른 사람의 체세포 핵을 이식해 줄기세포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온 세계가 그렇게 열광한 것도 유전자가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줄기세포는 공여자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짐에 따라 공여자에게 주입했을 때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손상된 조직을 재생시킬 것으로 예측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유전자만큼 확실한 미래의 지표도 없다.

그래서 본격적인 유전자 사냥이 시작된다. 각종 암에서 알츠하이머병에 이르는 질병뿐 아니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정신분열, 우울증, 동성애 그리고 행복마저도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특정 유전자와 질병의 강한 상관관계가 밝혀진 것도 많다. 우리가 상식과 직관으로 아는 형제와 부모·자식 간의 닮음도 유전의 증거다. 그 유전을 매개하는 것이 세포핵 속의 염색체에 있는 DNA라는 분자의 염기서열이다. DNA는 물질인 동시에 정보다. 책에 쓰인 글자와 문장이 종이와 잉크라는 물질로 구성되지만 또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과 같다. 바로 그 DNA가 우리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사람들이 양의 간을 꺼내 미래를 점쳤듯이, 세포 속 유전자를 검사해 미래를 내다보려고 한다.

문제는 우리의 상식이 DNA라는 물질과 그것이 예측하는 미래를 다른 범주에 두고 있다는 데 있다. DNA는 시험관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물질이지만, 미래는 시험관에 담을 수도 미리 살아볼 수도 없는 열린 세상이다. 책상 위에 놓인 비행기표는 가까운 미래에 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그 여행에서 만나게 될 사람과 이국적 풍광을 미리 경험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통계적으로 특정 유전자와 성적 취향의 강한 상관관계를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 유전자가 그 주인을 동성애자로 만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버지가 대머리면 아들도 대머리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유전은 분명한 과학적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 유전자가 써준 각본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최대한 자신을 퍼뜨리려는 유전자의 조종을 받는 생존기계일 뿐이라고 말하는 의 리처드 도킨스도 유전자의 본성을 거스르는 문화의 힘을 인정한다.

원시적 뇌, 전두엽, 그리고 소통의 구조

유전자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 속에 들어 있지만 우리가 유전자를 움직여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는다. 우리는 손과 발을 움직이고 머리(뇌)를 써서 살아간다. 19세기 골상학은 머리뼈의 모양으로 미래를 점치는 사이비 과학이지만 뇌가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가정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난 수십 년간 엄청나게 발전한 뇌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뇌는 유전의 물질적 메커니즘과 삶의 다양한 경험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다.

그렇다면 유전적 요소가 뇌의 몇몇 부위를 특별한 패턴으로 배선하고 그로 인해 동성애를 비롯한 삶의 취향을 가지게 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실제로 언어·지각·인지 등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부위와 신경전달물질들이 밝혀져 있다. 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은 신경접합에서 분비된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억제해 치료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경향이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의 배선과 거기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그리고 그 물질의 분비를 조절하는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생존과 본능에 충실한 원시적 뇌뿐 아니라 주어진 환경의 입력을 맥락에 맞게 해석하는 커다란 전두엽 그리고 그 두 부위를 연결하는 소통의 구조를 진화시켰다. 뇌는 1천억 개에 달하는 신경세포의 연결망이 만들어내는 무수히 다양한 활성화의 패턴을 통해 기능한다.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끌리는 마음도 그런 활성의 패턴 중 어떤 것이 만들어내는 경향성일 것이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신경세포 연결망의 활성 패턴은 무한에 가까울 만큼 다양하다. 뇌졸중으로 몸의 반쪽이 마비된 환자가 꾸준한 물리치료로 그 기능을 일부나마 회복할 수 있는 것도 뇌가 새로운 패턴을 활성화해 손상된 부위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뇌 조직의 80% 정도가 손상되었는데도 일상생활에 거의 지장이 없었던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뇌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유전자가 주로 생물학적 결정의 구조라면 뇌는 유전생물학의 경향성을 따르면서도 맥락에 따라 다양한 삶을 살게 해주는 이야기꾼이다. 그래서 동성애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성애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에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동성애는 심리적·사회적·생물학적 요소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성적 행동의 패턴일 뿐이다. 뇌는 그 행동 패턴의 더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또한 사회와 문화의 입력을 받아들여 그 회로를 재조직하기도 하는 되먹임의 구조로 돼 있다.

검증과 반증에 열려있어야 과학

유전자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과학의 도구 중 하나다. 유전이 과학인 것은, 미신이나 사이비 과학과는 달리 다양한 검증과 반증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검증과 반증은 도그마에 빠지지 않는 건전한 회의주의를 통해 작동하는데, 알려진 사실이라도 반복해서 의심하고 확인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우리를 새로운 통찰로 이끌기도 하는 건전한 회의주의는 뇌과학과 유전학처럼 서로 다른 연구 분야가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소통하는 과정에서 싹튼다. 천안함 사건에 얽힌 수많은 과학적 의혹에도 자신이 구성한 사건만이 진실이라고 우기는 사이비 과학자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이기도 하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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