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가르친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뜻’ 혹은 ‘계획’이라고 보며 이로 말미암아 만물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사람이 가진 뜻과 계획도 태초의 말씀에 종속되며 말씀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종교적 삶의 핵심이다. 하지만 은 그 뜻이 구체적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 명확히 말하지 않거나,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그래서 말씀의 뜻을 속세에 전할 권위 있는 신의 대변자가 필요해지고 교회와 성직자가 생긴다.
‘해석’하는 종교, ‘설명’하는 과학
과학은 말씀을 ‘해석’하기보다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말씀과 달리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과학의 설명은 다양할 수 있다. 과학은 그 설명들이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주장은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주장보다 더 많은 현상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었기에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단순한 막(membrane)을 경계로 환경과 대사산물을 주고받는 자기복제 시스템에서 진화해왔다는 설명도 마찬가지다. 이 설명은 모든 생명체가 수천 년 전 조물주에 의해 일시에 창조됐다는 믿음보다 많은 현상을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묶어준다.
하지만 과학은 종교와 달리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모순과 불일치를 허용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눈부신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우여곡절은 대개 과학이론에 있을 수 있는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진리로 믿어버린 데서 비롯된다. 생명과 세상에 대한 ‘설명’을 넘어 사람을 ‘구하고 돕는 것’이 목적인 의학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확실한 대안적 설명이 없는 한 이론의 오류는 수정되지 않고 오히려 모순에 적응하며 더 강해진다.
서양의학에서 2천 년 동안 진리로 여겨졌던 사체액설은 우리 몸이 혈액·점액·황담즙·흑담즙 네 가지 액체로 구성됐다고 설명한다. 각각은 따뜻하거나 차갑고 축축하거나 건조한 성격을 나눠가진다. 따라서 몸이 뜨겁고 축축해지는 증상이 있으면 그 성질을 가진 혈액을 뽑아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의 생물의학이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 가장 일반적인 치료법이 정맥을 절개해 많은 양의 피를 뽑아내는 사혈(瀉血)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에는 고열을 동반한 미생물 감염이 가장 일반적인 질병이었고, 네 체액 중 피가 가장 다루기 쉬웠던 때문이기도 하다.
이 이론은 피가 간에서 만들어져 정맥을 따라 온몸을 돌다가 사라진다고 설명하는데, ‘서양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가 제안하고 고대의학을 집대성한 갈레노스가 발전시켜 널리 전파했다.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저서를 남겼고, 1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서양의학의 절대 권위로 군림했다. 근대 이전의 서양의학이 갈레노스에 대한 주석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폐기된 이론이지만 당시에는 설명을 넘어 ‘말씀’의 권위를 가졌던 것이다.
근대 과학혁명 이후 기계적 세계관이 싹트고 천체의 운행에 대한 수학적 설명이 가능해지자 이 관점을 인체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혈액은 간에서 나와 여러 장기에 영양을 공급하고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펌프 역할을 하는 심장을 중심으로 온몸을 순환한다는 증거가 제시된다. 유명한 윌리엄 하비의 ‘혈액순환설’이다. 그는 아주 간단한 실험으로 혈액순환을 ‘증명’했다. 이로써 서양의학은 갈레노스의 ‘말씀’을 따르는 맹목적 실천에서 경험적 ‘증거’에 따라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과학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에는 동맥과 정맥만이 알려졌지만 혈액순환 이론은 정맥과 동맥 사이에 모세혈관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고, 이는 현미경이 발명되자 곧바로 확인됐다.
그러나 설명과 실천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비는 의학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의사로서 일할 때는 여전히 사혈에 의존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과학적 관점으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자기모순이다. 하지만 사혈이 ‘말씀’이던 당시의 분위기를 상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새로운 이론은 과거의 ‘말씀’에 적응하고 특별한 대안이 없는 한 관행적 시술은 계속된다.
차가운 생물의학의 대안으로이후 인체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과학적 사실들이 축적되면서 더 이상 사혈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론과 실천의 간극은 오히려 더 벌어진다. 사체액설은 폐기되고 기계적 인체관에 근거한 생물의학이 자리를 잡았지만, 그 이론에 따른 치료법이 개발되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균이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병을 앓다 죽은 사람의 몸을 열어 죽음의 국소적 원인을 밝히는 등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실제로 환자를 구하는 데는 대체로 무력했다. 그래서 의학사가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를 ‘치료허무주의 시기’라고 한다. 아는 건 많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형국이다.
이후 질병의 주요 원인이던 세균 감염을 막는 소독법과 고통 없이 수술할 수 있는 마취술, 그리고 몸속에 침입한 세균을 죽일 수 있는 항생제가 개발되고 실제로 많은 사람을 살려내면서 의학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확신에 찬 찬양으로 바뀐다. 이렇게 현대의학의 성공신화는 20세기 내내 계속된다. 이론과 실천의 간극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의과대학의 교육은 기초와 임상으로 구분됐는데, 임상의학은 주로 동물을 대상으로 한 기초의학 연구에서 발견된 사실을 사람의 임상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도식이 적용됐다. 이제 경험 많은 의사보다는 객관적 의학지식이 병을 낫게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축적된 경험보다는 과학이론이 예측한 가능성을 중심으로 각종 치료법이 생산되고 소비된다. 하나님이나 갈레노스가 아닌 과학과 그것을 상품화한 자본이 새로운 ‘말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의학은 추상적 개념보다는 직접적인 일상의 몸 경험에서 출발하므로 과학의 ‘말씀’에 귀기울이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20세기 말에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과학 과잉에 대한 반성은 의학을 그 생생한 몸 경험의 토대 위에 올려놓으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미 확립된 몸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이론에 건강과 질병의 상태를 억지로 꿰맞추지 않고, 환자가 직접 겪은 생물·심리적 경험과 그로 인해 발생한 인간적·사회적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의학은 질병의 원인과 결과, 그 치료법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또한 인간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실천적·도덕적 임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기계적이고 차가운 생물의학에 반대하는 대안의학의 형태로 시작된 이 흐름이 점차 주류 생물의학의 흐름까지 크게 바꾸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몸을 기계에 비유하는 사유 양식에 익숙하지만, 우리가 앓는 병이 고장난 기계가 일으키는 기능장애 이상인 것도 상식이다.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새 지식을 모두 습득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그래서 지식(설명)을 중심으로 하는 의학에서 벗어나 환자의 고통을 중심에 세우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의학은 ‘질병을 설명’하는 데 모든 자원을 쏟아붓기보다 질병으로 생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의대 교육도 구체적 사례 해결 중시이제 의과대학의 교육도 해부학·생리학 등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배워 이것을 내과와 외과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 있는 특정 환자의 사례를 주고 그 환자의 ‘문제’에서 시작해 질병과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하는 ‘문제바탕 학습’(Problem-Based Learning)으로 변하고 있다. 생명이 환경이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는 적응 과정을 통해 진화됐음에 비춰보면 진화의 논리에도 부합하는 접근법이다.
생명을 비롯해 의학은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태초에 있었던 것은 말씀이 아니라 풀어야 할 ‘삶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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