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천년이 열리던 2000년 한국 의료계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의약분업을 둘러싼 정부, 의사, 약사, 그리고 시민단체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더니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다섯 차례나 병원 문을 닫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한편 텔레비전에서는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50%가 넘는 시청률을 보이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허준은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위중한 환자를 만나자 출세의 욕심을 접고 환자를 돌본다. 시청자는 파업 중이던 현실의 의사와 너무나 다른 모습에 감동했다.
드라마 과 몸을 보는 시선
허준은 16~17세기를 살았던 실제 인물이며 을 지은 위대한 의학자다. 과거를 포기하고 환자를 돌보는 장면은 역사적 증거가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연출해낸 것이지만, 사실이 아니어도 대중의 감동은 줄지 않는다. 허구는 현실에서 받은 상처를 어루만져줄 치유의 훌륭한 도구고, 드라마에서는 진실과 허구의 구분보다는 그 이야기가 시청자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감동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허준의 스승이 제자로 하여금 자신의 주검을 해부하도록 한다는 설정은 또 다른 감동의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아는 학자로서는 그 감동의 크기가 훨씬 작을 수밖에 없었다. 으로 집대성된 16세기 조선의 의학은 ‘음양오행’이라는 세상을 바라보는 틀과 정(精)·기(氣)·신(神)이라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기능적 신체 구성 요소를 기본으로 하는 의학 체계다. 뼈와 근육, 장기, 조직, 세포, 유전자로 구성된 구조적 신체를 상정하는 오늘의 생물의학과는 전제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해부학에 바탕을 둔 생물의학을 전제로 400년 전의 의학을 바라보려는 것은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통해 400년 전에 그려진 동양화를 감상하려는 것과 같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를 오늘의 해부도(解剖圖)와 얼핏 비교해보기만 해도 당시 의학에서 인체 해부가 필요치 않았음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드라마 작가를 탓할 이유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와 문화의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프리즘을 대상화해 조사하고 그렇게 바라본 몸이 시대와 문화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밝히는 것은 의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는 필자와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은 몸에 대한 과거·현재·미래의 시선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교재다. 주로 기계적 구조와 형태에 주목하는 작가의 시선은 허준에게 스승의 주검을 해부하게 한다. 하지만 의사학자(醫史學者)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런 설정은 ‘지금 여기’의 시선으로 ‘그때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는 ‘문화 폭력’이다. 물질적으로 닫힌 몸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변화하는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다.
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은 그것이 인식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몸을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소가 모두 몸이다. 나는 몸을 통해 몸을 보고 알며 그렇게 알게 된 몸 또한 내 몸속에 간직된다. 시대와 문화의 안경도 내 몸의 일부고, 세상을 느끼고 아는 것도 바로 내 몸이다. 의학은 시대와 문화의 영향을 받는 몸에 대한 앎의 체계임에 따라, 어떤 학문보다 사회적 변화에 민감하다. 세계보건기구가 건강을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닌 ‘생물·심리·사회적 안녕상태’(bio-psycho-social well-being)로 정의한 것도 생물학적 몸의 심리·사회적 민감성을 중히 여긴 때문이다. 여기서는 몸과 마음과 사회가 하나다.
정치적 자유가 전염병을 치유한다?전염병과 급성 질환이 고통과 죽음의 주요 요인이던 시절에는 질병을 정상에서 벗어난 생물학적 현상으로 설명하는 생물의학이 인류의 구원자였다. 하지만 각종 암과 대사질환 등의 만성병, ‘현대의 역병’으로 불리는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 그리고 자살과 사고와 폭력이 만연한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심리·사회적 설명과 처방 없이는 인류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인류가 앓고 있는 질병과 고통을 바라볼 새로운 관점이 필요해진 것이다.
지금의 주류 생물의학은 심리·사회적 요인이 질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질병 발병 양상과 사회적 분포를 연구하는 역학자(疫學者)들은 생물학적 근접 요인 없이도 질병을 설명하고 퇴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콜레라를 일으키는 근접 원인(세균)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발병 양태를 분석해 획기적 예방에 성공한 19세기 영국의 역학자 존 스노가 그 효시다. 북부 독일에서 발생한 티푸스를 조사한 뒤 근접 원인을 제거하는 의학적 개입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를 해결책으로 제시한 세포병리학과 사회의학의 창시자 루돌프 비르쇼도 있다.
최근에는 ‘소득 불평등 정도’라는 사회적 지표가 질병과 고통의 상당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켓의 연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846호 표지이야기 ‘평등은 장수와 행복의 비결’ 참조). 그들의 연구는 △평균수명 △비만 △유아사망률 △심장병과 당뇨 △약물남용과 정신질환 등 건강 수준뿐 아니라 △학업성취도 △10대의 출산율 △폭력과 투옥 △살인 등 사회적 지표도 소득 불평등과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면밀한 통계분석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들은 사회가 평등해지면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부자들도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평등해야 부자도 더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인데, 질병을 생물학적 현상으로만 보아온 현대의학과 세상을 이익을 다투는 살벌한 경쟁의 장으로만 여겨온 정책담당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아직은 그 연관성의 직접적 원인을 설명할 만한 과학적 근거도 미흡해 보인다.
인지과학도 ‘평등해야 건강하다’ 뒷받침그러나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다양한 경험의 관계를 뇌신경의 기능과 구조에 연결시켜 연구하는 인지과학은 윌킨슨과 피켓의 주장에 상당한 과학적 근거를 댈 수 있다. 개인의 주관적 행복에 미치는 사회적 요인을 뇌의 활동과 관련지어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의 성과도 그 주장에 호의적 증거를 제공한다. 우리 몸이 일정 부분 시대와 문화의 산물이라는 자각이 새로운 논의의 출발점이며, 건강을 생물·심리·사회적 안녕상태로 정의한 세계보건기구의 권위가 사회·문화적 배경이다.
인지과학은 몸의 일부인 뇌가 몸의 나머지 부분과 그 몸이 살아가는 외부 환경을 반영해 스스로 변해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가는 자기생성 구조를 상정한다. 과거의 경험은 뇌에 구조화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때 활성화되는 예측회로를 생성한다. 새로운 경험은 과거에 형성된 예측회로에 크게 의존하지만 되먹임을 통해 그 회로를 새롭게 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과 환경은 뇌를 매개로 하는 상호 되먹임 구조로 얽혀 분리되지 않는 경험의 총체다.
건강과 질병의 경험, 그리고 소득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과 각종 사회문제를 낳는 구조도 이와 같을 것이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는 일반적으로 경쟁심과 상호 불신이 깊고 범죄가 많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공포와 분노를 촉발하는 방어의 심리기제를 부호화한 예측회로를 가지게 되고, 이것이 경험을 통해 강화되면 몸과 마음은 만성 스트레스로 인해 점차 피폐해지고 질병과 범죄로 연결된다. 건강이 생물·심리·사회적 안녕상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직 구체적 경험연구는 드물지만, 소득 불평등이 거의 모든 건강문제와 사회문제의 원인이라는 윌킨슨과 피켓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가설이다.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영역을 넘나드는 새로운 학문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드라마 은 우주로 열린 큰 몸을 다루는 ‘큰 의사’(大醫)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현대의학은 감염을 비롯한 재앙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큰 공을 세웠다. 미래의 의학이 어떤 모습일지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볼 때 자연과 사회로 열린 큰 몸을 다루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때건 몸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며 시대의 병을 앓는 공간이기도 하다. 문명사회에서 현대인의 몸은 더 이상 혹독한 자연이나 결핍을 앓지 않는다. 우리는 풍요와 불평등을 앓는 몸들이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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