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는 설렘이고 흥이다. 막걸리를 소재로 방담을 하기 위해 술을 직접 빚어보려고 했다. 막걸리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고, 누룩을 사기 위해 이곳저곳 알아보았다. 술이 익으면 친구들에게도 나눠주고, 친척들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해야지 하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결국 편의점 생막걸리가 우리의 방담 자리를 차지했지만, 준비하는 기간 내내 함께할 생각에 행복했다. 막걸리, 너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니?
문영: 아이가 어려 거의 외출을 못하는 저도 요즘 막걸리의 인기가 느껴져요. 막걸리를 소재로 한 드라마, 다큐멘터리, 맛집 정보들. 요즘 아이 아빠도 한잔하고 오면 그 한 잔의 정체가 보통 막걸리더라고요. 막걸리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니 ‘맞아, 막걸리가 있었지. 내가 왜 잊고 있었지?’ 싶어요. 뭐랄까 돈을 빌리려고 이 친구, 저 친구를 찾아다니다가 집에 비상금 숨겨놓은 것이 생각난 느낌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고달픈 학창 시절, 달고 단 위로인숙: 막걸리는 억울하던 학창 시절의 한 줄기 위로였어요. 정의를 외치며 풀리지 않는 매듭을 고민하던 학생들의 한풀이에 막걸리가 빠지지 않았지요. 눈물이 있고, 흐트러짐이 있고, 체념의 흥얼거림이 있던 방황의 시간에 막걸리가 있었어요. 막걸리는 젊음의 고뇌를 함께 겪던 나약한 이들의 아픔을 휘휘 저어 걸러주던 약속의 손가락이었어요. 누구에게나 더듬어보면 아픈 추억 하나쯤은 있는데 막걸리는 내게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하네요.
동수: 대학 시절 농촌 봉사활동을 갔을 때 농부 아저씨들이 주시던 막걸리가 생각나네요. “아! 달다” 하시던 그 술맛은 잘 몰랐지만 논일을 하다가 새참으로 막걸리를 꼭 마셨어요. 고된 농사일에 추임새 역할을 막걸리가 했지요. 흥을 아는 민족이라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즐겼던 것 같아요. 인도를 갔을 때 만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사람들은 술을 참 좋아한다고 말하더군요. 지정된 상점에서만 술이 판매되는 그 나라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우리네 술 문화를 이해하기는 어렵겠지요.
인숙: 컬컬하고 거친 맛으로 푸대접을 받던 막걸리가 다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요? 요즘은 여성이 더 즐겨 마신다고 하던데. 막걸리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듯해요. 막걸리의 색깔도 다양해지고, 담아내는 그릇도 화려하고, 곁들이는 먹을거리도 담백해져 이름만 막걸리고 예전의 정겨운 허술함을 찾을 수 없어요. 세련되고 멋있어졌지만 텁텁한 맛과 시큼한 향에서 오는 걸쭉함은 전만 못하더군요.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발효 조건을 바꾼 걸까요?
동수: 막걸리를 마시고 혈당이 낮아졌다는 사람, 변비가 없어졌다는 사람, 지루하고 힘든 암 투병 생활을 가끔 마시는 막걸리로 이겨냈다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막걸리는 다른 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영양성분이 들어 있어요. 각종 유기산들은 갈증을 해소하고 체내의 피로물질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요. 발효의 찌꺼기로 남겨진 섬유질은 장에 이롭고요. 게다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술이기 때문에 농사일로 지친 몸과 맘을 달래기 위해 막걸리를 새참으로 즐겼겠지요.
지원: 생막걸리에 들어 있는 효모는 어떻고요. 효모는 그 자체가 단백질 덩어리예요. 다양한 아미노산이 풍부하게 있고, 유전이나 단백질 합성을 지배하는 중요한 물질인 핵산도 풍부해요. 비타민도 풍부하고요. 더욱이 밝혀지지 않은 효모의 생리활성 물질들은 막걸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영양성분이에요. 고혈압 유도 효소를 저지하는 효과도 있고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네요. 하지만 이런 핑계로 도를 넘어 마신다면 독이죠.
문영: 유산균도 빼놓을 수 없어요. 요구르트와 비슷한 정도이거나 더 많이 들어 있기도 해요. 유산균이 장속에 들어가면 장내 산도가 높아져 잡균의 번식을 막을 수 있어요. 유산이나 구연산, 호박산 등의 유기산도 적당히 있어요. 유기산은 신진대사를 촉진해 피로회복에 좋고, 피부미용에도 좋아요.
지원: 피부미용 하니까 생각나는데, 누룩을 찾으려고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하니 분말로 만든 마사지용 누룩 팩이 많이 있더라고요. 보습과 미백, 주름 개선 기능까지 한다니 웬만한 기능성 화장품보다 다재다능하단 생각이 들던데요. 게다가 화학첨가물 없는 제대로 된 천연 화장품이잖아요.
기다림의 술이자 성급한 술문영: 그렇게라도 우리 누룩이 상품이 되어 팔린다니 마음이 놓이네요. 막걸리가 인기지만, 누룩 수요는 별로 늘지 않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거든요. 시중에 파는 보통의 막걸리는 발효를 위해 백국균(아스페르길루스 카와치)을 써요. 원래는 일본에서 증류식 소주를 만들기 위해 선별된 균주예요. 백국균은 산 생성력이 아주 세서 주변을 산성으로 만들고, 이런 환경은 잡균의 오염을 방지해줘요. 이런 효과가 발효 속도를 높이고 술의 실패율을 낮춰주고요.
동수: 누룩은 곡물에 누룩곰팡이를 번식시킨 것인데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우리 누룩을 만드는 과정이 나오더라고요. 곡식을 쪄서 발로 밟아 둥그렇게 빚어 자연발효를 하는 거예요. 누룩곰팡이는 현재 알려진 게 50가지 정도 되는데, 자연발효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균이 배양된다는 의미이지요. 일본식 누룩은 홑임(낱알) 누룩으로 보통 곡식을 찐 뒤 뭉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요. 오히려 낱알로 잘 펴서 종균을 뿌려줘요. 마치 우리가 요구르트를 집에서 만들 때 우유에 유산균을 넣어주는 것과 비슷하게요. 우리 누룩은 곰팡이가 피려면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하지만, 일본식으로 하면 이틀만 지나도 술을 빚을 수 있대요. 더구나 하나의 균만 있으니 발효 뒤 술맛도 일정하고요.
인숙: “아! 시원~하다.” 모진 땀을 한 잔 술에 날려버리던 우리네 농부들이 내뱉던 탄성은 누룩곰팡이에서 오는 걸까요? 가슴속까지 타고 흐르던 막 발효된 막걸리의 거친 숨소리고, 목젖을 적시던 발효균의 탄성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네 막걸리는 발효를 위해 시간이 필요한 기다림의 술이에요. 하지만 마저 기다리지 못한 미완의 변주이기도 하지요. 가라앉히고 거르는 정제 단계를 거치지 못한 성급한 술이에요. 그래서인지 막걸리는 기다리다 순간을 참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범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닮았어요.
문영: ‘좀더 빨리, 좀더 많이’가 요구되는 세상이니 우리 누룩은 경제성이 떨어지는 발효제 취급을 받아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네요. 하지만 우리 누룩으로 빚은 막걸리도 있어요. 그 막걸리 주인이 인터뷰한 것을 봤는데, 이사를 가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었더니 술맛이 다르더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는군요.
지원: 메주의 수만 가지 미생물 중에서 알려진 것은 10%가 안 된대요. 우리 누룩도 생전분을 그대로 사용해 메주처럼 빚어서 자연발효하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은 미생물들이 발효 과정에 참여해요. 공기 중의 곰팡이, 효모, 세균 등…. 한마디로 미생물의 총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니 표준화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의 입맛이 다양하듯 다양한 누룩의 막걸리가 지역의 문화를 담아 더 많이 보급된다면 우리 문화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겠죠.
인간을 살아남게 한 진정한 생존 본능
동수: 보릿고개처럼 굶주리는 시기는 없어졌지만 식량은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예요. 다국적 곡물회사가 세계 식량 산업을 좌우하면서 식량이 무기화되고 있어요. 이런 현실에서 식량자급률이 낮은 우리나라가 주목해야 할 분야는 발효산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우리 발효식품에 들어 있는 미생물에 대한 연구를 정확히 수행해야겠지요.
인숙: 집집마다 김치를 얻어 그 안의 미생물을 조사한 연구소가 있더군요. 그 가운데 한 집의 김치가 유달리 신선한 것을 보고 미생물을 추출해 다른 곳에 넣었더니, 쉽게 부패가 일어나지 않더래요. 이를 잘 연구한다면 보존제로 상품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문영: 좋은 흙을 구해 연구하는 분들도 계시던데요. 그분들은 방선균이 많은 흙을 좋은 흙이라고 해요. 방선균은 흙 속의 유기물을 분해하고, 스트렙토마이신이나 테트라시클린 같은 항생물질을 생산해요. 항생물질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방선균을 찾는다면 또 다른 금맥이 되겠죠.
지원: 방선균은 감자나 고구마에 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소 입속의 상처를 통해 몸 안으로 침입하게 되면 뼈조직을 파괴하고, 종양을 만드는 방선균병을 일으키기도 한다네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미생물 자원도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예요. 위험 속에서도 기회를 보는 것이 인간을 이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진정한 생존 본능이 아닌가 싶어요.
인숙: 장수하는 나라로 알려진 불가리아와 일본은 요구르트와 낫또의 나라로 알려졌어요. 그들보다 많은 발효식품을 가진 우리는 세계에 통용되는 맛을 가지지 못했지요. 냄새가 고약하고 정확한 맛과 분량이 정해지지 않은 비과학적인 음식이라고 무시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전통 발효식품이 다양한 변수로 계산한 훌륭한 경험과학의 산물임이 증명되고 있지요. 물과 공기와 바람의 흐름까지 계산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숱한 미생물의 활성에도 정성을 들인 실험과학이라 할 수 있어요. 선조의 지혜를 모은 다양한 시도와 방대한 자료를 함부로 방치한 우리네 어리석음이 아쉬워요. 지금이라도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게으름과 아둔함을 버리고 전통식품을 계승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요?
동수: 우리는 예로부터 손맛은 어머니의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그것이 사람마다 손에 묻어 있던 미생물 때문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어요. 미생물을 죽이고 없애 나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살아나가는 것이 생존 방법이겠지만, 앞으로는 미생물과 공존해 우리 편으로 만드는 지혜로운 생존 방법을 선택해야겠지요. 우리 유전자 속에는 미생물과도 사이좋게 지낸 훌륭한 생활방식이 천 년 넘게 스며들어왔으니 발효산업의 강국이 될 기본은 갖춘 셈이네요.
지원: 집집마다 빚어 맛과 향기가 다양하던 수많은 술이 사라지게 된 계기는 식민지 시대의 조세법 개정 때문이었어요. 이후 세율이 높아지자 막걸리 양조장들이 사라져갔고요. 1960년대 들어 국세청의 주도로 양조장 통폐합 작업이 이뤄졌고, 막걸리의 다양성은 계속 줄어들었어요. 정부의 주류 정책은 효율적인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가 1991년부터 막걸리를 보호하기 위해 주세를 5% 낮췄어요. 요즘은 정부가 나서서 막걸리의 세계화를 추진한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정책 때문에 막걸리가 다시 잊히는 술이 되지 않기를 바라요.
문영: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저는 막걸리가 주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좋아요. 그런 느낌은 소주나 맥주에서는 느낄 수 없어요. 막걸리를 마시면 어릴 적 방학 때마다 놀러갔던 시골의 할머니·할아버지가 생각나요. 막걸리는 우리 문화를 쉽게 담을 수 있는 술이 아닌가 싶어요. 막걸리에 우리 문화를 같이 실어 멋진 콘텐츠가 있는 술로 특별해지면 좋겠어요.
새로운 소통 만들어냈으면…인숙: 막걸리는 누구라도 돋보이게 해주는 술이지 않나요? 대통령이 마시면 친서민적으로 보이고, 노동 중에 한 잔씩 마시면 고통을 줄이고 흥을 돋우는 삶의 지혜로 보이고, 학생들이 마시면 젊음의 열정으로 보이고요. 누구와도 어울리고, 어떤 자리에서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위력을 발휘하는 막걸리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소통을 만들어내면 좋겠어요.
동수: 잘 발효된 막걸리는 과음하지 않는다면 정말 약이에요. 누군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언제냐고 물어봤는데, 이상하게도 ‘20대 초반’이라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 제일 좋다고 해버렸어요. 20대의 상큼한 젊음은 아쉽지만, 오히려 막걸리처럼 제법 숙성된 지금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사회도 그렇겠죠? 다툼과 상반된 입장으로 어느 정도 부글거리다가 합의점을 찾는 잘 숙성된 사회, 숙성될 때까지 서로 기다려주는 사회, 막걸리가 그런 세상을 꿈꾸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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