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트로트 가수라는 심수봉이 1984년에 발표해 큰 인기를 끈 노래다. 여기서 떠나는 사람인 남자(배)는 이별에 눈물을 보이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쓸쓸한 표정을 짓지만 곧바로 웃어버리며, 아주 가면서도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는 존재다. 그리고 각 절은 ‘남자는 다 그래’로 끝난다. 반면 보내주는 사람인 여자(항구)는 말도 없이 바다(남자와 여자의 거리)만 바라보다 눈물지으며 돌아오는 힘없는 존재다.
사랑, 욕망보다 못한 여분의 형질
‘바람기 있는 남자’와 ‘지조를 지키는 여자’라는 정형화된 성 이미지를 구성진 가락과 오묘한 목소리에 담아 재현해내고 있다. 이 노래가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던 이유는, 가슴을 울리는 가락과 음성, 그것과 어우러진 가사 내용이 우리 안의 정서와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른 이유를 생물학적 차이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남녀관계를 논할 수도 없다. 진화생물학과 거기서 파생된 진화심리학은 남녀 차이뿐 아니라 정형화된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진화의 역사로 설명한다. 진화의 추동력인 자연선택은 변이·유전·선택 과정으로 구성된다. △개별 생명체는 같은 종에 속하더라도 서로 다르다(변이) △그 다름은 후손에 전해진다(유전) △다른 형질 중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것만 살아남아 후손에 전해진다(선택).
우리의 행동 특성은 그 과정을 거쳐 자연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바람둥이가 대체로 남자고 지조를 지키는 것이 여자(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인 이유도 남녀의 차별적 속성이 자연에 의해 선택됐기 때문이다. 진화 관점에서 보면 남녀의 사랑도 결국 후손을 많이 남기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일부일처제보다는 일부다처제가 더 효율적이다. 남자는 씨를 뿌리고 여자는 그것을 거두는 분업이다. 여기서는 사랑도 남녀의 역할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처음 단계에서는 유용하지만, 생존과 번식의 효율이라는 진화 관점에서는 욕망보다 못한 여분의 형질인 셈이다. 그래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된다.
생물학의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보면 여자가 항상 말없이 눈물만 흘리거나 돌아서지는 않는다. 사랑의 결과인 임신에서도 여자의 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자가 뿌린 씨앗의 전횡에 저항한다. 태아는 주로 엄마와 아빠의 유전정보를 반씩 물려받지만, 어떤 유전자는 온전히 엄마의 혹은 아빠의 것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 경우 상대 부모에게서 온 해당 유전자는 침묵한다. 이를 ‘각인 유전자’(Imprinted Gene)라고 하는데, 아빠에게서 온 각인 유전자는 엄마 몸에서 태아가 크고 빠르게 자라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고, 엄마에게서 온 각인 유전자는 태반과 태아의 성장을 억제하는 조건을 만든다. 각인 유전자는 각각 엄마와 아빠의 유전적 이익을 관철하는 생물학적 대변자인 셈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임신이 행복한 출산으로 이어지지만 우리 조상에게 임신은 진화적으로 필수인,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위험한 과정이었다. 임신이 된 몸은 이런 위험 속에서 서로 많은 복사본을 후손에 전하려는 엄마와 아빠의 유전적 이익이 충돌하는 곳이다. 물론 그들의 ‘의도’가 반영돼 이렇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생물학적 결과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아빠 몸에서 온 각인 유전자가 너무 강하게 발현되면 융모막암(Choriocarcinoma)이 되고, 엄마의 것이 지나치게 강하면 유산이 된다.
다처다부 초파리가 진화시킨 독성수명이 며칠밖에 안 되는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윌리엄 라이스의 실험 결과는 훨씬 더 극적이다. 초파리는 다처다부의 습성에 따라 번식한다. 암컷은 많은 수컷과 교미하므로, 동시에 여러 수컷의 정자를 간직하고 있다. 암컷 몸속에서는 정자들이 암컷의 난자와 수정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이런 방식에 따라 40세대 정도 번식을 계속하면 수컷의 정자는 다른 수컷의 정자를 죽이는 독소를 진화시킨다고 한다. 독소는 어미 몸에도 해롭지만, 암컷은 세대가 거듭되면서 해독제를 진화시키므로 번식에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수컷과 수컷, 수컷과 암컷 사이의 치열한 군비경쟁이다.
이제 무리에서 몇 마리의 암컷을 분리한다. 수컷은 계속 이런 번식 방식을 유지하고, 암컷은 일부일처 방식으로 번식해 정자 독소와 관련된 진화를 억제한다. 40세대가 지난 다음 가장 강한 독소를 진화시켜 가장 많은 후손을 거느린 가계의 수컷과 진화가 억제된 가계의 암컷을 교미시킨다. 그 결과는 진화가 억제된 암컷의 현저한 수명 감소로 나타났다. 수컷이 진화시킨 독소에 대한 항독소를 진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그렇게 수명이 단축된 암컷을 다처다부의 경쟁 상황 속에 40세대쯤 진화시켰더니 단축되기 이전의 수명이 회복됐다.
앞에 든 사람과 초파리의 사례에서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혹시 남자는 바람둥이일 수밖에 없는 진화적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땅의 카사노바와 성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심수봉의 노래처럼 남자는 들락거리는 배이고 여자는 그 배들을 맞이하는 항구일 수밖에 없을까? 남자는 정말 다 그럴까? 그런 본능적 욕망을 억제하라고 가르치는 윤리·도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애초에 우리 인지 구조가 추상적 개념이나 일반화된 논리가 아닌 생존과 생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됐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동물의 배설물에 ‘불결’이라는 관념이 부여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해왔다. 무서운 포식동물에서 나는 냄새와 소리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전에 몸에 받아들여져 우리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하거나 재빠르게 도망치도록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동성보다는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서로를 끌어당긴다.
현실세계에는 생각보다 복혼(Polygamy)이 많고, 어떤 문화권에서든 성적 상대가 많은 쪽은 주로 남성이라는 사실이 ‘다 그런’ 남자들의 경향성을 말해준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진화적 압력을 받으며 살아온 결과다. 우선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남과 여는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로 표현될 만큼 다른 진화적 경험이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남과 여의 진화적 경험을 이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번식을 위해 진화했지만 번식보다 위대한 일을 해낸다. 새의 깃털은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 진화했지만 하늘을 나는 엄청난 기능을 수행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 사랑은 남녀 간 유전적 이익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진화했지만, 이제는 그 차이를 초월한 새로운 문화적 진화 영역을 열어놓았다. ‘차이를 알면 사랑이 보인다’는 연애 교과서의 조언은 이렇게 진화의 역사로 확장되고 생물과 문화는 서로를 끌어당겨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을 만든다.
진화는 운명이 아니다앞에서 살펴본 초파리 실험에서 이번에는 생식을 통한 군비경쟁 대신 일부일처가 강제되는 상황을 만들어본다. 모든 개체는 한 파트너와만 짝을 짓고 그렇게 태어난 후손도 일부일처 방식으로 번식을 하도록 한다. 이렇게 40세대가 지난 다음 확인해보니 어떤 암컷과 수컷도 독소와 항독소를 만들지 않게 진화했다. 이제 다른 수컷의 정자를 죽이는 독소는 적응이 아니라 장애가 된다. 더욱 놀라운 건 이렇게 진화한 가계의 개체는 무한 경쟁을 통해 독소와 항독소를 진화시킨 개체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진화적 적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다른 개체와의 경쟁에 쓰던 자원을 모두 생존과 번식에 쏟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과 여의 차이는 진화적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면 더 큰 사랑의 가능성이 보인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이지만 진화가 우리 운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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