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국회에서 벌어진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과 야당 의원들의 설전은 생명의 본성에 관한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대규모 감세안이 대기업과 고소득층만을 위한 정책이라는 야당 의원들의 공격에 강 장관은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무시한 정책은 오래 존속되기 힘들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재원 부족으로 고민하는 다른 나라의 재정장관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은 매년 세금이 ‘남아서’ 고민이라고 자랑했다고도 한다.
그의 말과 이후의 정책을 정리하면,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는 누진세는 인간 본성에 맞지 않으며 세금이 남아돌아도 복지예산을 늘려 저소득층을 도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은 냉철한 이성으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의 태도다. 그러므로 소득에 따라 세율이 올라가는 누진세는 그 본성을 발휘해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자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생학의 늪에 빠진 자연선택론
1859년 출판된 찰스 다윈의 은 다양한 생명체가 생존경쟁을 통해 새로운 형질을 획득하면서 환경에 적응해가는 ‘자연선택’의 원리를 공식화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역작이다. 다양한 자연현상을 오랫동안 면밀히 관찰하고도 십수 년이 지난 다음에야 출판된 이 책은 신중함과 철저함을 추구하는 과학의 귀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출판 직후부터 출판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과학뿐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윤리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논란의 씨앗이 되고 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소신 역시 이 책에서 제시된 자연선택의 원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이를 인간 사회에 적용한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생명의 본성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다. 조금이라도 생물학을 공부했다면 이것이 생명의 두드러진 특성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그것을 생명의 유일한 원리로 볼 것인지, 상호부조와 협동이라는 상반된 원리와 보완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 △일반 동식물에서 발견되는 생존 원리를 그대로 인간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지라는 것이다. 다윈 자신이 이 두 문제에 대해 뚜렷한 견해를 피력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분명 생물계의 다양한 수준에서 상호부조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했고, 당시에 만연했던 노예제를 강하게 비난하는 등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른 인간 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윈의 불도그’라 불릴 만큼 열렬한 진화론자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무자비한 생존경쟁이 자연의 원리임을 인정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인간은 그 본성을 통제할 윤리를 진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사회진화론자들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 따른 자연선택의 원리를 인간 사회와 역사에 확대 적용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려는 모든 시도를 자연에 거스르는 것으로, 인종차별주의를 자연적 본성으로 해석했다. 자연에 관한 면밀한 관찰 끝에 발견된 자연선택이라는 과학 원리가 제국주의적 식민지 건설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이후 이 논리는 열등한 인간의 생식을 막아 인종을 개량해야 한다는 우생학으로 발전했고, 나치를 비롯한 독재정권이 유대인과 집시를 열등한 인종으로 낙인찍어 말살정책을 편 명분이 되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자연선택을 자연‘도태’로 잘못 번역하는 것도 진화에 대한 우생학적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 때문이다.
도와야 진화한다그러나 1990년대 들어 크게 발달한 뇌과학과 인지과학은 진화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탄생시켰다. 우리 뇌의 기본 구조가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기능에서는 획기적으로 진화했고, 그로 인해 다른 동물과는 구분되는 진화 경로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크게 발달한 언어기능과 그로 인한 추상적 사고능력,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고 처리할 만큼 큰 신피질 등의 신경학적 차이는 우리에게 자연선택 과정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었다. 이로써 윤리적 사유가 가능해졌고, 자연선택의 결과이기만 했던 우리가 이제는 그 선택의 방향을 개척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자연선택과 인지능력의 상호 되먹임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유전물질의 무작위적 변이 외에 행동과 상징이 진화의 주요 동력으로 추가되었다. 이기적 유전자가 생명의 주인이고 우리 몸은 생존기계일 뿐이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고도로 진화한 뇌가 유전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장면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경쟁을 통제할 수 있는 가치와 조직, 그리고 그것들이 담긴 직관과 본능을 담당하는 큰 뇌를 진화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크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생존경쟁 외에 개체들 사이의 협동과 상호부조가 진화의 또 다른 주요 동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자본 지배와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에 묻혀 빛을 보지는 못했다. 자연선택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구도를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1902년 발간된 크로포트킨의 는 동식물과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협동과 상호부조의 사례들로 넘쳐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상호부조는 생존경쟁과 함께 진화의 중요한 동력이다.
1990년대에는 다른 개체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뇌에서 관찰 대상의 뇌 활성 패턴을 흉내 내는 ‘거울 뉴런’이 발견되었다. 우리의 뇌가 실제로 다른 개체의 뇌와 공조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우리는 개인이지만 또한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상식이 과학으로 입증된 것이다. 우리가 TV 속 슬픈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것도, 교실에서 한 학생이 하품을 하면 다른 학생들도 연속적으로 따라 하게 되는 것도 몸속에 내재된 ‘이웃을 흉내 내는 본능’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물건을 훔치려고 그 집에 들어간 도둑이라도 뛰어가 구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맹자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서로 연대함으로써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해온 ‘서로 돕는’ 존재인 것이다.
합리적 판단에 따른 이기적 행동을 만사의 기준으로 삼는 고전경제학의 경제인(home economicus)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행동경제학의 결론이다. 우리들 속에는 서로 도울 뿐 아니라 그러지 않는 개체를 처벌하려는 정의의 속성 또한 내재됐다는 증거가 있다.
‘최후통첩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는 ‘가’와 ‘나’로 분류된 두 사람이 실험의 짝이 된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앞으로 만날 가능성도 없다. ‘가’에 속한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 둘이서 나눠가지라고 한다. 그 비율은 ‘가’가 결정하고 ‘나’에게는 그 제안을 받거나 거절할 권리만 주어진다. ‘나’가 그 제안을 받으면 ‘가’가 제안한 비율로 돈을 나누고, 거절하면 두 사람 모두 빈손으로 돌아간다.
일정 비율 이하의 제안을 받은 ‘나’ 그룹은 그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손해인데도 대부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상대방이 7만원을 갖고 내게는 3만원만 주겠다고 하면 차라리 그 3만원을 포기함으로써 상대방의 정의롭지 못한 탐욕을 처벌하는 것이다. 액수가 많아져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 무시한 경쟁 부추기는 사회우리 몸은 생존경쟁을 통한 진화의 결과지만, 서로 공감하고 도우면서 살아온 풍부한 경험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 진화적 경험의 기록이 유전자이고, 크게 발달한 뇌와 뇌세포의 활성 패턴이다.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이 그렇듯이 경쟁과 협동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견해와 이해를 달리하는 쪽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한쪽 면만 나오는 동전 던지기를 계속한다.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무시한 정책은 오래갈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와 본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바탕을 둔 정책은 국가의 미래를 망치고 국민을 불행하게 할 것이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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