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즐겨 보던 참고서에 ‘완전정복’ 시리즈가 있었다. 얼마 전에는 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를 전쟁하듯, 그것도 남김없이 완전히 ‘정복’하듯 하라는 뜻을 담고 있어 씁쓸하지만, 당시엔 무척 매력적인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공부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었고, 국어·영어·수학·물상·생물은 자연스럽게 익혀야 할 삶의 지혜이기보다는 굴복시켜야 할 정복의 대상이었다. 아는 것에 모자라거나 흠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100점’이라는 시험 점수가 바로 그 완벽의 상징이었다. 이 점수에 근접한 순서로 완전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을 구분하는 방식은 지금도 그대로다.
모든 것에서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몸 상태에도 이 기준이 적용된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건강은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안녕 상태’를 말하지만, 기업과 언론이 퍼뜨리고 상식이 받아들이는 건강은 대체로 몸에 대한 완전정복이다. 여자의 몸매는 S라인이어야 하고, 남자는 초콜릿 복근을 가져야 건강하고 완전한 남자 취급을 받는다. 이런 몸매는 피땀 어린 노력으로 내 몸을 정복함으로써 쟁취하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주관적 판단에 대해서도 ‘완전’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완소남’ ‘완소녀’), 우리는 부족함 없는 완전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완전한 건강은 없다
이런 경향은 대체로 상업적 대중문화의 영향 때문이지만, 또한 몸과 마음을 분리하고 분리된 몸을 객체화한 근대 서양과학의 생각 틀 때문이기도 하다. 몸에서 ‘마음’이라는 주관적이고 변화무쌍한 존재를 떼어내자 이제 몸은 객관적이고 조작 가능한 기계적 존재가 된 것이다. 17세기에는 정자와 난자라는 생식 단위가 알려지기는 했지만, 수정란에서 태아까지의 발육 과정에 대한 학문인 ‘발생학’은 없었다. 따라서 그 둘의 결합이 어떻게 어린아이를 발생시키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정자 속에 아주 작은 아이(Homunculus)가 들어 있다고 가정한 것이었다. 이것이 난자 속에 들어가 그 속의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성장한다고 본 것이다. 당시는 천체 운동에 관한 물리법칙이 알려지고 시계를 비롯한 자동기계의 발명이 유행한 시절이었으므로, 인체의 발생에 대해서도 물리적·기계적 사유 양식이 그대로 적용됐다.
우리는 이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유전적 정체성을 형성한 뒤 세포분열을 통해 기관과 조직을 만드는 인체 발생 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의 정체성이 미리 정해진다는 생각을 떨쳐내지는 못한다. 정자 속 작은 아이가 수정란 핵 속의 유전체로 대체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유전체는 미래의 청사진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체세포의 핵을 다른 여자의 난자에 이식해 줄기세포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내 몸속에 넣으면 나의 다른 세포와 똑같이 행동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유전체가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치명적 빈혈 유발 vs 말라리아 저항성개인의 유전적 정체성을 인간 종 전체로 확대하면 ‘종 디자인’(Species Design)이 된다. 21세기가 시작될 즈음 공개된 인간 유전체 연구계획의 결과가 바로 종 디자인의 청사진이다. 이로써 개인에 따른 유전정보의 차이를 드러낼 표준적 염기 서열이 완성됐다. 하지만 표준이란 것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표준은 수많은 ‘차이’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가 깨끗한 물과 공기가 풍부한 환경에서 살아가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하듯이 유전적 표준은 거기서 벗어난 차이의 상태를 충분히 알아야 비로소 정해질 수 있다. 유전적 완전성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불완전성을 통해 드러나는 과정적 상태일 뿐이다.
우리 건강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정상상태인 종 디자인과 그것을 기준으로 하는 완전한 건강은 없다. 정상과 건강은 작은 차이들의 축적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완벽한 몸과 완전한 건강을 추구한다. 범람하는 다이어트 상품과 보양식품의 소비 증가, ‘몸짱’과 ‘얼짱’ 열풍은 모두 질병 퇴치를 넘어 완전한 건강을 얻으려는 몸부림이다.
완전한 몸에 대한 집착은 ‘완전한 민족’이라는 허상을 추구하게 한다. 역사상 이 두 가지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현상이 인간 종을 개조하려는 우생학의 유행이다. 우생학은 흔히 유대인 같은 이민족의 말살을 도모했던 나치 독일의 악명과 함께 기억되지만, 사실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유행하던 과학이며 시대적 조류였다. 식민지 조선에도 조선우생협회(1933)가 결성돼 민족 개조를 외쳤는데, 그 발기인의 면면을 보면 당시의 지도적 지식인이 거의 모두 망라됐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미국과 북유럽에서는 수십만 명의 정신지체자, 장애인, 마약중독자, 매독환자 등 신체적·정신적·윤리적으로 열등하다고 분류된 사람들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았다. ‘완전한 건강’과 ‘완전한 민족’이라는 구도에서 이들은 솎아내야 할 불량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완전에 대한 갈망은 불완전에 대한 불신이 되고 억압이 된다.
이제 우생학의 공포는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강제와 억압을 뺀 자발적 우생학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우리 모자보건법은 우생학적 이유가 있을 경우 낙태를 허용하고 있고, 산전 진단을 통해 기형과 질병의 유무를 알아내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선택적으로 아이를 낙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부모의 취향에 따라 아이의 형질을 조절하는 ‘맞춤’ 아기와, 사회의 필요에 따라 기능적으로 특화된 인간을 만들어내는 영화 의 세상이 그리 멀지 않다는 전망도 있다. 매일 유전자가 조작된 동식물로 만든 음식을 먹고,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복제동물이 탄생하며, 배아줄기세포로 손상된 조직을 재생하는 기술이 개발되는 상황에서 이런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전자가 수십억 년이라는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다양한 환경과의 상호 적응을 통해 형성돼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런 전망은 금세 우려로 바뀐다. 기껏 수만 년에 불과한 인간 지성의 역사가 수십억 년간 진화해온 생명의 지혜를 극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은 단순한 추론에는 강하지만 수많은 생명의 상호작용과 이들이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복잡한 생태적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는 아직 약하다.
산소를 운반하는 피 속 적혈구가 초승달 모양으로 찌그러져 빈혈을 일으키는 겸상적혈구빈혈이 생태적 관계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가장 간단한 사례다. 자연선택 원리에 따르면, 이 병을 가진 사람은 대개 사춘기 이전에 사망할 것이므로 후손을 남길 가능성이 적음에 따라 이 병을 전하는 유전자도 점차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높은 유병률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 유전자를 동형접합(두 개의 대립유전자가 똑같은) 상태로 가지면 빈혈이 생기지만, 이형접합(대립유전자 중 하나는 이 유전자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을 때) 상태로 가지면 말라리아에 저항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말라리아가 많은 지역에서는 이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오히려 생존에 도움을 주므로 자연선택에 의해 살아남은 것이다. 유전자는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될 수 있다. 만약 이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악당으로 규정해 모두 없애버린다면 예측하기 어려운 생태적 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
유전자의 과거를 캐는 진화의학
그래서 최근에 조금씩 관심을 끌고 있는 진화의학에서는 인위적으로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선택하기보다는, 그 유전자가 진화해 살아남은 역사적 경험에 주목한다. 아직 구체적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사소한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다른 시기나 다른 질병에서는 생존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아픈 사람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병자생존(病者生存)의 역설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거나 잔병치레가 많은 사람이 오히려 더 오래 산다는 ‘골골 80’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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